설교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2016.09.25)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6-09-29 17:02 조회수 3061


설교제목 :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
성경본문 : 시편 19편 7~14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6. 09. 25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여러분은 얼마나 이해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경험된 영적 체험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하는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런데 자신이 안수를 받았다던가, 아니면 예언기도를 받았다면 그것이 거짓이 되었든지, 진실이 되었든지 자신이 당한 그 상황을 말씀보다 더 우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서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면서도 이것이 말씀의 묵상이 아닌 자신의 잡념이나 공상으로 흘려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씀이 자신의 생각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각과 척척 맞아떨어지는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생각과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맞추도록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否認)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기분에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묵상(黙想)이라고 합니다. 묵상은 ‘내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께 집중하여,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사랑의 계명을 따르고, 말씀을 지키도록 이끌어주는 기도’를 말합니다. 즉, 내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 적응하도록 단련하고 훈련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하여 읽고, 생각하고, 거기에 나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나 자신을 복종시키고, 헌신시키고, 단련시키는 훈련이 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마음에 좋은 대로, 입맛대로, 자기 쾌락을 따라서 안수기도 받아야합니다. 자기 마음에 흡족한 예언 기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헌금이라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내 삶에 고통을 만듭니다. 말씀이 내 생각을 묶습니다. 말씀이 내 버릇을 고칩니다. 사사건건 말씀이 나에게 간섭을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묶어 버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버릇을 고치려고 합니다. 말씀을 내 생각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나는 복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나는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만큼 의롭고, 정의롭고 믿음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조금 더 지나가면 내가 하나님이 되어버리는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1. 말씀을 지키므로 상이 크다는 것일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합니다. 시19:7-8절에"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부패와 오류로부터 벗어난 흠 없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감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인간에게 무한한 힘과 위로를 줄 만한 것이라곤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육신을 위하여서는 유익하고 세상적으로는 교훈이 되는 금언들이 더러 있지만 육과 영을 유익하게 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런데 그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투성이인 내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쪼개고 나누면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말씀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파괴하는 범죄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는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성품과 의지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증거는 성도들에게 확실한 위로의 근원이 되며, 끊임없는 소망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 영원성과 통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에 의지하며, 그를 신뢰하며, 신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 부분에만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소위 말씀이 채찍이 되고, 교훈이 되고,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는 것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칫 말씀이 잘 못 전달되면 그것이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은 정직함으로 그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그것을 준행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불의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악한 사람들이 부와 권세를 얻고, 또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좇아 그들을 부러워하며 추종할지라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진실 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훈은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순전하며 진실하도록 정직한 마음을 회복하여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은 순결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의 길을 찾는 자들에게 빛이 됩니다. 그 계명은 우리의 죄악과 부도덕함과 더러움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밝게 해줍니다. 그리고 순결한 하나님의 계명은 순결하지 못한 것들을 밝히 드러내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된 본분에서 떠나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그 말씀을 고백하며 살 수 있을까? 여호와를 경외케 하는 것이 율법의 참된 목적입니다. 그를 경외한다는 것 중의 하나는 타락한 풍습과 저속한 관습에서 벗어나 정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며 살 때 인간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정결하고도 도덕적인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그 말씀에 의존하는 삶은 모든 시대에 걸쳐 참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의 변화가 성경에서 규정하는 선가 악의 본질을 변경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 있어서 참된 선이며, 정결한 도(道)이며,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 영원한 진리의 말씀은 죄를 판단하고 역사를 심판하고 모든 풍습과 관습을 주관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무엇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의를 불의가 심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그 규례대로 온전히 성취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우리의 삶 속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판단들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해 '그 말씀은 과연 진리이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 완전한 율법에 이끌려 살기를 시도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구원의 은혜, 내세에서의 복이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19:9-11에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세상적이며 이 땅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총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물질은 육신과 이생을 위하여서 잠깐 유익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과 영원한 삶에 유익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삶에 대한 이정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송이 꿀같이 달고 맛이 있습니다. 감각적인 즐거움은 금방 싫증이 나게 되고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즐거움을 공급하여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 주며, 항상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갈구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채워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경고의 말씀으로, 때로는 책망과 도전의 말씀으로, 때로는 위로와 평강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잘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삼상3:10의 말씀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는 신앙의 자세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가장 귀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씀이 자기도 모르는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소위 말씀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말씀으로 세상의 복을 구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진리에 설 수 있게 해달라는 영적인 가치를 높이려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소위 더 성숙하고 가치 있는 인간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한 차원 더 높고, 한단계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어떻게 묵상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3. 내 입의 말과 묵상이 주님께 열납 되어야 합니다. 다윗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에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죄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하나님께로서 있고, 구원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말과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말씀의 묵상과 기도가 곧 예배이며, 제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도와 말씀의 묵상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니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라고 생각해 보신적 있습니까? 하나님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쪼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말씀의 묵상인 것입니다. 이 능력을 아는 성도는 더 철저하게 자신을 주께 드리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기 좋으라고 말씀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말씀의 묵상이 더욱 필요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육신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련한 예물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에 나 자신을 맞추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되새기고, 또 되새길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만족, 자기 합리화를 위한 말씀의 묵상이 되어선 안됩니다. 나 자신을 희생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주님 앞에 열납되는 말씀의 묵상이 되어야 합니다.

 

즉, 기도하는 만큼 봉사하고, 말씀 묵상하는 만큼 실천하고. 예배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실천이 빠진 예배와 기도, 말씀 묵상이 있었기에 성숙한 신앙인과 교회를 볼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실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부인하고 말씀을 고백하는 성도로 충만한 교회, 기도하면서 그 기도가 내 삶에, 우리 교회에, 이 나라에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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