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3.20)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6-03-22 00:22 조회수 3224


설교제목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성경본문 :  마태복음 21장 1~11절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6. 03. 20


마21:1-11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세상에서 단 한 번 다윗의 자손으로 “공적인 호칭”을 받는 부분이 오늘 이 부분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공적인 호칭을 대중으로부터 받은 곳이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오직 마태에 의해 삽입된 호칭으로 그의 유대독자들을 의식하여 사용한 표현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어떤 사람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메시야에 대한 표현입니다. 단순히 왕의 후손, 즉 왕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待望)해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런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지 언급된 곳이 있다면 마9:27에 소경이 눈을 뜨기 위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마15:22에 여인의 딸이 귀신이 들렸을 때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한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9절의 말씀처럼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대중(大衆)이 무리가 공적으로 외친 부분이 바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만왕의 왕이요, 다윗의 자손으로서 공적인 사역을 마무리 지으며 행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이 강도의 굴혈(掘穴)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돈을 바꾸는 사람, 즉 교회 안에서 이자놀이가 성행되었습니다. 욕심과 부패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소행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또 한 가지의 사건은 마21:18절 이하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열매가 없었습니다. “앗, 이때는 열매의 때가 아닌데......” 예수 그리스도는 속을 들여다보십니다. 잎이 무성한 만큼 분명히 그 무화과나무는 결실이 없을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시는 분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면을 보시는 주님께 우리의 내면에서 성숙하여 열매 맺는 신앙의 열매들을 보여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21:33이하에 포도원의 비유가 나타납니다. 주인을 때리고 죽이는 사람에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면서도 스스로 교회의 주인이라고 행하는 사람들, 예수가 주인이라고 섬기면서도 자신이 교회를 주관하려는 사람들을 질책하시는 말씀입니다. 멋대로 교회의 행사, 재정, 인사, 이권개입을 주관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주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마22:1이하에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타납니다. 예수의 몸된 교회에 와야 할 사람들이 소팔러 갑니다. 밭을 갈러 갑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신의 사업, 개인의 사역을 중요시 하다가 결국 버림을 받습니다. 이런 사건들 속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다윗의 자손”, “만왕의 왕”이 되심을 만민들에게 나타내셔야 하셨습니다. 그런 증거들을 보세요.

 

1.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 나귀가 어디서 났습니까? 맞은 편 마을에 묶여있었습니다. 돈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이 한마디에 그냥 나귀를 내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구절로 성도를 농락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도들의 것을 갈취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그리고 과연 그것을 주께서 쓰셨습니까? 자기가 썼지.

 

그런데 2절의 말씀을 보세요.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풀어서 끌고 오라는 말을 보세요. 그 나귀 새끼를 어미에게서 끌어다가 다기 코를 뚫고 목을 메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의미는 사실 아닙니다. 나귀 새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풀다'라는 말에는 깨뜨리다, 파괴하다, 녹이다, 벙어리의 혀를 풀어 말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심지어 나귀 새끼도 인간의 억압에 의해 예수를 등에 태운 것이 아닙니다. 나귀 새끼가 얼마나 날뛰겠습니까? 훈련도 안되고, 조련도 안된 짐승이, 게다가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얼마나 천방지축이 되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귀새끼는 예수께 순종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자의 주가 되시며, 심판주가 되심을 사람들에게 기억되게 하심입니다. 나귀 새끼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받으시는 가장 큰 대접이었습니다.

 

왜? 이왕이면 더 큰 대접을 받으실 수 있으실 텐데 왜 그리스도는 왕의 대접을 이 작은 나귀새끼로 나타내셨을까요? 세상의 것으로 치장하는 사람들, 부와 권세의 상징을 돈, 명예, 권세로 그 상징성을 가집니다. 이것은 거지가 치장을 해도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닙니다. 비록 낮은 천한 작은 것인 나귀새끼를 탔어도 그것을 보고 가난한자, 무지한자가 아닌 “다윗의 자손”, “왕 중의 왕”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위대한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담임사관이 아닌 주님이 여러분의 것을 쓰시겠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주님이 요구하실 때 내가 잠간 없었어야 하는데 말이죠. 주님이 쓰시겠다고 찾으실 때 내가 무척 바빴어야 주님의 요구에 외면할텐데...... .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선물입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사랑입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을 향한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내 어깨 위에라도 올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주님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고 힘든 것, 어려운 것이라고 외면해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의 어깨 위에 주님을 모셔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조각이나 일부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부를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 성도들 신앙인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부자, 명예, 권세들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고,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비된 자신을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말씀으로 준비된 사람, 봉사 정신으로 준비된 사람, 희생정신으로 준비된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2. 예수께서 왕이 되시는 증거는 칭송을 받으셨습니다(마21:8-11). 9절의 말씀을 보세요.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아주 우렁찬 경배의 탄성입니다. “구하소서”라는 경배의 외침소리 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왕의 가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왕의 가문이 아닙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세워진 가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이 나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예수가 달리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왕 되심에 참여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가 타시는 나귀에 자신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이것을 의미하여 오늘을 종려 주일이라고 그 이름이 붙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진 것이 그것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겉옷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것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종려나무의 가지를 베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것도 없는 사람은 소리를 내어서라도 “다윗의 자손”, “호산나”외쳤습니다. 9절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라고 했습니다. '소리를 높였다'라는 말은 까마귀처럼 울어 대는 것을 말합니다.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것도 없는 사람들은 까마귀가 울어대는 것처럼 주를 경배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것은 가난의 표시기기도 하지만 온전한 헌신과 순종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이 없으면 오늘까지 주의 신앙과 교회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주를 위한 사랑의 열정과 온전한 헌신이 오늘날 전 세계에 주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렇게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주님의 계획에 우리의 신앙의 삶과 온전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예수 십자가의 신앙이 우리의 중심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교회가 지켜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찬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길가에 있는 돌들이 오히려 소리질러'(눅 19:40) 인류의 대속(代贖)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를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준비된 저와 여러분이 예수의 이름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전통을 지켜야 합니다.

 

3. 온전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7-8절의 말씀을 보세요.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영광을 위하여 정말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가진 것을 주님 앞에 드려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릅니다. 몸을 드리는 삶, 물질을 드리는 삶, 시간과 재능을 드릴 수 있는 삶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준비된 나귀를 주님 앞에 드리는 사람, 준비할 물건이 없지만 지금 내가 현재 가진 것을 즉시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 즉시 내어 놓을 것이 없어 주변을 살피다가 종려나무의 가지를 꺾어 길에 깔고 흔들 수 있는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목소리로라도 주님을 향하여 외칠 수 있다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내 삶이 이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가시는 길에 내 작은 믿음이 드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힘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생명이요 우리 신앙의 생명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 헌신이 교회로 하여금 세상에 주님의 십자가를 생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낳습니다. 그 생명은 교회를 지탱합니다. 가정과 사회를 지탱합니다. 이 헌신이 또 나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고난주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여 금식과 절제로 자신의 죄를 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생명의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런 삶으로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자신의 바쁜 계획을 접어두고 그리스도 앞에 순종하는 기회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기    도

 (0)
댓글 작성시 등록하신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