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왕 같은 제사장의 임무(2016. 3. 13)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6-03-15 20:56 조회수 2458


설교제목 : “왕 같은 제사장의 임무”
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2장 9~10절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6. 03. 13


벧전 2:9-10

왕 같은 제사장의 임무

 

 

 

이 세상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높아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많은 권력과 권위와 권세를 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칭찬하면 좋아하고, 섬기면 대접받는 것으로 알고 좋아 합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내 주변의 상황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분열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에게 임무와 책임을 부여 합니다. 게다가 현대에는 도덕성과 윤리성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흠을 보이거나 리더십에 문제가 생기면 금방 비판의 대상에 오르게 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반드시 그 뒤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마땅한 삶은 소금이 아닙니다. 빛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과 임무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던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삶은 높아져도 그 높아짐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권세가 있고,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된 삶을 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삶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는 그것이 소금이고 빛입니다. 기독교인이 그 고유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 어느 것, 그 어느 삶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5장의 소금과 빛의 내용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기독교인은 왕 같고, 제사장 같은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 권력과 권세를 누리며 살면 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고, 소유된 백성은 그 임무와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소위 기독교를 광고해야 합니다. 교회를 광고하고 다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삶이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거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부터 나타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그만큼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통하여 권세도 유지되고, 권력도 유지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손가락질 당하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해서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 주님께로부터 받음 사명, 즉 임무가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광고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광고하려면 돈도 들고 건강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거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럼 자본이 생길 때까지 생각만 하면서 기다립니까? 아니면 자본을 구하려고 사방팔방을 다닙니까? 다녀야죠. 다니지 않으면 뭐 하나 생기는 것이 있겠습니까? 주의 일도 그렇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돈도 없고, 힘도 안 되고, 능력도 없으니 주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해'하면 그야 말로 아무 것도 안 됩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이걸 해 봐야지 하고 움직이면 하나님이 건강 주십니다. 시간도 주십니다. 물질도 주십니다. 그런데 손해 볼까봐 이렇게 재보고, 저렇게 재다보면 그야말로 시간만 흘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말 무의미한 때가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권세있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이런 확실한 주관이 있어야 합니다.

 

1.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9절 전반부를 보세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뽑힌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뽑혔습니까?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으로 뽑혔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신분적 분류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은 곧 제사장입니다. 소위 신앙과 세상적 삶의 일치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제사장은 신중한 믿음과 고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이기 전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의 분명한 본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명예, 권세, 권력에 물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부패하고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왕 같은 제사장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 외에는 없습니다. 목회자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정치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목회자가 사업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문제입니다. 게다다 목회자가 사회적 인지도를 힘입겠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목회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의 찬양하는 삶, 그 하나면 충분한 겁니다.

 

거룩한 나라,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대속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도(聖徒)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에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 당하셨을 때 그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듣기만 하면 그 때 생각이 나서 부끄러워 숨는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에 트라우마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보면 가슴이 아프고, 십자가만 보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많이 배웠다고 하지만 도덕성이나 윤리성이 없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사랑과 자비가 그 마음에 없습니다. 높아 졌지만 그 마음에 배려나 아량도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뭐든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져야 합니다. 왜 이런 마음이 들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내 것이고, 나의 결정이고, 나의 계획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획과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나를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겁니다.

 

2. 그리스도인으로서 권세 있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오직 주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 합니다. 이 본질이 점점 변하면 기독교인과 세상 사람들과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맙니다. 세상과 기독교와의 경계선이 무너지면 그 때부터 기독교는 사라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계선이 무너지면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가 쉬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이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거나, 복음의 세속화가 되어 기독교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믿어야 합니까? 세상에서도 기독교적인 문화를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데 말이죠. 예수님을 만나려면 꼭 교회에 가야 합니까? 꼭 교회가 필요 합니까? 그래서 교회의 무용성을 말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서서히 세상의 논리와 힘에 사라져 갑니다. 소위 기독교가 그 본질을 잃으면 순식간에 교회는 세상에 정복당하고 맙니다.

 

기독교가 그 본질을 확고하게 세워야 합니다. 그 본질이 뭔줄 아세요? 9절 후반절입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을 바꾸는 겁니다. 세상적 본질을 그리스도적 본질로 바꾸는 겁니다. 오직 내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오직 내 생활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나의 삶은 찬양하고 복음전하는 삶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으로서 본질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핵심적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름다운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 합니다, 본문에서 '아름다운 덕'이라고 번역된 아레테는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어 성경에는 찬양하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본질은 주를 찬양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겁니다. 기독교가, 특별히 한국의 기독교가 주님께 영광이 되고, 오직 주님만 생각하는 십자가적 본질로 돌아야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으로서 권세 있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스스로 낮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2:10에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튕기는 사람에게는 어던 관심도 줄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는데 튕기는 겁니다. 뭘 좀 주겠다는 데 튕기는 겁니다. 튕겨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겸손한게 아닙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여성에게 아름답습니다. 아니면 예쁩니다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요?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는 겁니다. '저 원래 예쁘거든요?' 이걸 확!하는 마음 생기죠? 남자에게 말을 건넵니다. 멋있게 생겼습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하죠? 그런데 뭐라고 말합니까? '멋있는 건 알아가지구"라고 말합니다. 어~~ 짜증나.

 

겸손해야 합니다. 잘났더라도 겸손해야 합니다. 칭찬을 받을수록 더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진리의 수호자들이 갖춰야 할 중요한 사명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교만하고, 자만하고, 자신이 가진 권세 부리고, 권력을 내세우면 그것만큼 꼴불견은 없는 겁니다. 그냥 낮아지세요. 코가 납작해 지도록 엎드리세요. 그것이 주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는 겁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왕 같은 제사장도, 거룩한 나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으로 예수 믿는 우리의 선배들을 통하여 불러주셔서 이렇게 잘난 사람 만들어 주셨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구하면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향한 영광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나의 과거사는 다 묻어두고 갑시다. 훌훌 털어버리고 삽시다. 그래야 오늘 말씀처럼 '이제는'이라는 말로 우리의 삶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겁니다.

 

전에는이 아닙니다. 이제는으로 삽시다. 이제는 긍휼과 은혜의 삶으로 삽시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것으로, 내가 주님의 것으로 오직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예수의 사람으로 세상에 기독교인의 본질을 빼앗기거나 흐려지지 않도록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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