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질적인 신앙(2016.2.7)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6-02-10 16:08 조회수 2846


설교제목 : “본질적인 신앙”
성경본문 :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6. 02. 07


 

 

마 5:13-16

본질적인 신앙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진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때 재빠르게 처신하며 바꾸어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한결같고 언제나 변함없는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각도 바뀌고 당연하게 행동도 바뀌어 가는데,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뭘 그렇게 고집하면서 변함 없이 지켜내고 유지하겠다는 것이냐”고 물어올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즉흥적이고 당연한 변화를 받아들임으로,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풍부한 가능성들을 스스로 버리거나 제거해 버렸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거나 자신에게 중요한 무엇을 잃는 대가라는 것입니다. 너무도 쉽게 자신을 변화시키고, 순간 순간 변하는 생각에 따라 곰곰이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을 빠른 변화의 세상에 팔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치밀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고 엉성한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자신의 굳센 의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산만한 느낌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닌 굴욕적 흔적만 남기고 자신을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 구석에 여전히 “끝까지 자신을 지켜내는 어떠한 고집스러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맹목적으로 끌려 다니지 아니하고 창조적인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와 공동체에 대해 느슨한 마음으로, 적당하게 시간과 사건의 흐름을 타면서 관람하는 자세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왔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옹골지게 스스로를 지켜내는 한결같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감사한 일인지 생각해 봅니다. 얄팍한 처세술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세상에 대하여, 그러한 삶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면 “적당히”라는 모호한 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끝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하게 편리한 방법으로, 적당하게 치밀한 태도로 접근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물러서는 그야말로 “적당하게 현명한 처세술”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행태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을 우리가 살아가게 하는 것은 찬란한 “명예”도 아니며, 그렇다고 굴욕적인 “멍에”도 아닙니다. 또 다른 “영웅담”을 만들어 내기 위한 수고도 역시 아닙니다. 오늘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1. 본문은 우리에게 본래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가 아닙니다. 이미 빛이며 소금이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오직 지켜내야 할 것이며 고집스러움으로 표현해야할 삶의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즉흥적인 변화의 처세술”이 파고들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처세술을 적용하려 든다면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격이거나, “아무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고집스럽게 오늘을 살게 하는 것은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우리의 행동을 보고 아버지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일이라고 말해 줍니다. 이 세상의 부패와 어둠으로 가득함을 성도로서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세상과 혼합되지 않도록 엄연하게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수많은 십자가 불빛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한국에 기독교 인구가 1000만을 헤아리고 있지만 오히려 성도들의 사역 활동이 점점 미미해져가는 현실을 보세요 ‘소금으로 빛으로’살도록 부름을 받은 성도의 본분이 더욱 필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쉽사리 고민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 “그렇다면 이렇게 해버리지 뭐”, “그렇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네”라고 말해 버립니다. 여기에는 자신에게 손해나지 않는 한, 적당한 선에서 판단하는 것을 배경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켜내야할 것에 대한 치열함이나 고집스러움이라고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운명인 듯 여기며, “사건의 흐름을 타고” 때로는 구경하며 때로는 냉소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적당히 현명한 방법”만 남습니다. 무엇을 해보겠다거나 넘어서겠다는 의지는 애초 상관이 없는 듯하고, 물같은 맹목만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자신과 공동체에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거나 “무의미한 파편”들만 남겨줄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실로 죄악된 세상과 타협함으로 그리스도인의 본연된 사명을 도외시하거나, 현실의 부조리와 죄악에 대해 비관적으로 쓴웃음만 던질뿐, 악한 세상의 조류를 방관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더욱 큰 어둠으로 뒤덮이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하신 의미를 새겨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쉽사리 중심을 잃어버리거나 적당선에서 행동하는 모호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일이 너무도 부패하여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지경이며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을 때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

 

“될대로 되라”라는 천박한 무책임이 우리에게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막연하게 말하면서 자신이 일의 중심에서 도망해 버리는 일이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라면, 막다른 곳에서도 일의 구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다시 시작하는 태도가 정말 필요합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삶”입니다. 결정적인 때에,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한결같이 믿음을 주는 “고집스러운 자리 지킴”이 서로에게 얼마나 커다란 용기가 되는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맛을 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소금의 맛을 내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믿는 성도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진리를 사수함으로 부패와 타락을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는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인 자세가 요구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희생의 삶을 삶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소금입니다. 변질된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 짠맛을 내지 못하면 소금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사해(死海)의 습지나 개펄, 그 근처의 바위 등 불결한 곳에서 나는 소금은 불순물이 많이 들어 있어서 쉽사리 변질되어 알카리성의 독특한 소금의 맛을 잃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변질된 소금은 소금의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밖에 버리워졌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치 못하며, 세상과 타협하여 성도로서의 맛을 내지 못하면 천국 백성으로서 합당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2.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빛된 삶입니다. 빛은 무엇보다 어둠을 밝혀 사물을 분간하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성도의 빛된 착한 행실은 결국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변함없는 자신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 아닌 모든 것이 세상의 유행과 흐름 따라 변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일편단심의 신앙을 가지고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굳건함이 필요합니다.

 

올 한 해 52주 정말 끈덕지게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야, 저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인이구나’라는 인정함을 보여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신앙은 내가 지킵니다. 내 교회는 내가 지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지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변함없이 고집스럽게 믿음을 지키세요.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세요. 이것이 교회 부흥의 기반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성장하는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겁니다.

 

'맛일 잃었다'라는 말은 어떤 감각적인 말이 아닙니다. 오늘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그 말에는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겁니다. 기억되지 않는다. 외워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맛을 잃었다는 말은 매운 맛, 짠 맛, 단 맛 등을 느끼지 못한다는 감각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면적인 의미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정말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그 맛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맛을 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려고 하지만, 그런 삶이 어떤 모습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고 싶은데 그게 어떤 모습인지 기억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삶의 모습들을 기억해 내야 합니다. 기억에 담으려면 자꾸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연습하지 않고 훈련하지 않으면 결코 생각을 해 낼 수 없는 겁니다. 맛을 담아 낼 수 없습니다.

 

3. 그리스도를 실천하는 모습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입니다. 소금이나 빛은 모습으로 본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할을 보아야 합니다. 빛은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인공적이 되었든, 자연적이 되었든 어떤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품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빛은 어느 곳에서든지 발산 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생각은 빛은 캄캄한 동굴이나, 밀폐된 공간에서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보다 더 확장 시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합니다.

 

산 위에 동네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 된 곳입니다. 그리고 달빛이 가장 먼저 도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도 빛은 필요합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소금이 필요 합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의 실천은 어느 곳에서든지 발휘되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그 필요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신앙인의 의미, 기독교인의 본질은 상실되도 맙니다.

 

16절의 말씀을 보세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내 자랑이나, 내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위함입니다.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 영광은 내가 세상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위 '맛'을 내던지 아니면 '빛'을 바라던지 하라는 겁니다. 속을 보이던지, 행동으로 보이던지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인 삶이 되는 겁니다.

 

사랑의 실천, 모범적인 예배, 진실한 기도의 삶. 말씀의 묵상과 실천, 돕고 섬기는 것에 대한 생활 등이 우리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 삶이 하늘에서 해같이 빛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의 모범이 되십시오.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선한 행실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요. 성도로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주의 참 사랑을 전하는 예수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0)
댓글 작성시 등록하신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