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원을 실행하는 사람들 (2016. 1. 17)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6-01-17 18:43 조회수 2926


설교제목 : “구원을 실행하는 사람들”
성경본문 : 야고보서 1장 21~27절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6. 01. 17



약1:21-27

구원을 실행하는 사람들

 

 

'신앙인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당신 교회 다녀?" "무슨교회?, 어떤 교회?, 교회 다닌지 얼마나 됐는데? 직분이 뭐야?"하는 것으로 내 신앙의 이력은 끝이 납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뭔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아니 척 보면 모르나?'하는 겁니다. 척 봐도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살고 있고,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한 말과 행동을 하는데 왜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서로 만나면 호구조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실천하지 못하고 사는 겁니다. 구원을 실천한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는 들어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세상 사람보다도 더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현대 기독교인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가끔 어떤 가게나,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으면 목탁 치면서 시주하러 들어온 중들을 많이 봅니다. 최근에 경험한 사례를 보면 찾아와 시주를 요청하는 중에게 물건을 산다거나, 돈을 주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찾아 와서 귀찮다는 겁니다. 영업에 방해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곤 하는 말이 '요즘엔 하도 땡중이 많아서...'하는 겁니다. 그럼 거꾸로 생각해 봅시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나, 예수 믿습니다. 같이 교회에 나갑시다.'라고 왜 못합니까?

 

기독교에 대한 현대인들의 반응이 별로인 겁니다. 게다가 복음의 삶을 사는 나의 모습도 그렇게 썩 좋게 비춰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도하지 말까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하면서 자꾸 아픈 곳을 파내고 들춰낼까요? 그렇게 해서 뭔가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삶이 개선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우선적인 것은 우리가 복음의 우선성을 발견하는 겁니다.

 

복음의 우선성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즉, 복음이 나에게 가장 먼저 도달하고, 그 복음으로 내가 살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닿아 내가 변화되고, 즐거움과 감사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 때 진정한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겁니다. 뭔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가슴을 치는 것도 없습니다. 감사나 은혜도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들은 겁니까? 듣지 않는 겁니까? 복음을 듣지 않은 겁니다. 그냥 세상의 소음이나 잡음 중에 하나로 들은 겁니다. 이것처럼 무의미한 삶은 없습니다. 헛것만 바라보고, 자기 좋은 것에 끌려서 사는 인생에 불가 한 것입니다.

 

초기 주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 수천 명씩 회개하는 놀라운 사건들이 나타났습니다. 안디옥에서는 얼마나 기독교인들이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고, 이웃을 섬기며 사랑했는지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겁니다. 그들에게 형식과 틀에 사로잡혀있는 종교의 시대에 실천과 섬김과 사랑의 종교를 보게 된 겁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활발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재림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렇게 활발하게 복음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그 삶을 멈추고 주의 재림에만 간절한 겁니다. 그리고 이웃을 돌보지 않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겨 사람들이 파를 나눕니다.

 

야고보는 그런 현상 속에서 분명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소위 실천하는 복음의 삶을 사는 겁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실천해야 복음에는 생명이 있는 겁니다. 실천하지 않는 구원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1. 복음은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21-22절에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실전하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듣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뭔가 자신의 주변에서 예수의 사역이 나타나야 합니다.

 

반성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성은 자신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후회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관찰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도 관대하고 쉬운 결론을 내려버리고 맙니다. 자신을 면밀하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를 뭘로 보고 그러느냐’고 합니다. 나같은 사람 없다고 합니다. 결코 자기 발전이 없는 사람입니다.

 

약1:26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자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앙을 절제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재갈을 먹인다고 하는 것은 함부러 날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로만 하는 사람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말과 행동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날뛰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제동 장치도 없이, 아는 것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지금 내 삶이,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아픔과 외면을 주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시32:9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무지한 말을 하는 사람은 노새라고 했습니다. 단속되지 아니한 노새는 날뛰게 되어 있습니다. 발로 찹니다. 그러나 재갈 물리고 고삐를 단 노새는 재갈 따라서, 고삐에 따라서 이끌립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에 물려야 합니다.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재갈과 고삐에 이끌려야 합니다. 결코 헛것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유함과 평안함으로 그 말씀이 싹이나고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행되어질 때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이 맛보고 경험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경험하되 좋은 것으로 경험하도록 해야 합니다. 막상 껍질을 벗기면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선 안 됩니다.

 

2. 복음의 삶은 기억하고 생각하는 삶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자꾸 까먹습니다. 기억을 하는 시간이 그렇게 많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젊다고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마음, 즉 긴장함이 없어지고, 질서와 법칙을 세운 것이 흐트러지면 잊게 되어져 있습니다. 사람은 늘 거울을 봅니다. 그러나 세심하게 거울을 보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 거의 없습니다. 늘 식사를 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 식사를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루 동안에 많은 말과 글, 소리들을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와 말과 글을 다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기억한다면 사람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냥 쉽게 잊게 되어져 있는 것이 인간의 인식 구조입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교한 문구나 본문을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들은 설교의 문구들 다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기억되어 있다면 지금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아무리 어릴 적에 배운 것이라도 중요한 것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잘 잊어버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에 중요성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늘 생활에 적용되고, 반복되고 있는 현상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기억 속에 강한 자극으로 남아 있으면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사람의 학습법이 있습니다. 100% 학습의 능력 중에서 듣는 것은 25%의 효과를 봅니다. 보는 것은 30%, 조작하는 것은 15% 기타가 30%입니다. 학습의 방법은 이 4가지가 모두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듣는 것은 10%만 기억한다고 합니다. 보고, 들은 것은 50%을 기억합니다.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은 90%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속담에는 들어서 잊어버리고 보고 기억하며 행함으로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이중에서도 내가 기억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배워야 할 것임을 강조할 때 기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가만히 있었는데 이렇게 기억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의 말씀을 보고, 듣고, 행해야만 한다는 강한 자극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고 강한 자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자극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은혜입니다. 찔림은 곧 은혜입니다. 회개입니다. 감사입니다. 말씀에 찔리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자극을 받는 시간들이 많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어찌할꼬’하는 은혜의 시간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냥 듣고 잊어버리는 것은 속이는 사람입니다. 의미 없는 사람입니다. 잊어 먹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복음을 행하는 사람이 실속 있는 사람입니다. 약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말씀을 살피는 사람입니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있는 사람은 묶인 사람입니다. 병든 사람입니다. 속이 아픈 사람은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밥을 먹어야 몸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먹지 못합니다. 이것은 병에 묶인 사람입니다.

 

살이 찌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운동을 하리라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바빠서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피곤해서 하지 못했습니다. 이젠 귀찮아서 못합니다. 생활에 묶인 사람들입니다. 돈을 벌어야 합니다. 악착같이 모읍니다. 쓸 줄도 모릅니다. 베풀 줄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돈돈 합니다. 이젠 자유 해야 합니다. 즐거움으로 바꿔야 합니다. 감사로 바꿔야 합니다. 회개로 바꿔야 합니다. 은혜로 바꿔야 실속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25절 하반절에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듣고 말면 소용없습니다. 보고 기억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복 받을 수 있도록 주의 말씀은 기억해야 합니다. 주를 위한 삶의 모습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듣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보고 기억 못해도 안 됩니다. 이런 현상들이 오래되면 노망드는 겁니다. 건망증이 되는 겁니다. 치매가 되면 당사자도 힘들지만 가족도, 주변의 사람들도 힘이 듭니다. 나로 인하여 남이 힘들어선 안 됩니다. 남이 힘들게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실속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사, 즐거움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음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복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성결하고, 하나님의 진실한 복음의 사역사자는 세상을 향하여 외칠 뿐만 아니라 이웃과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고 구원하는 생명의 삶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다에 빠진 생명들을 구하는 구원선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담대히 주의 말씀과 구원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의 구원을 보고 과연 21세기 기독교 교회라고 인정해 줄 수 있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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