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원의 삶을 위하여(2016.01.03)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6-01-03 21:05 조회수 3075


설교제목 : “구원의 삶을 위하여”
성경본문 :  로마서 5장 6~11절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6. 01. 03



롬5:6-11

구원의 삶을 위하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구원과 생명의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 신앙인을 다른 말로 풀면 '구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고백하며 사는 기독교 신앙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삽니까? 교회는 열심히 출석하지만 말과 행동이 엉망인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기독교인으로 불리지만 구원의 삶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원의 삶은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작은 예수로서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적어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능력과 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사는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아멘'하고 화답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입니다. 그 다음이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그 다음엔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구원받은 신앙인의 삶에는 바울처럼은 아니더라도, 베드로처럼은 아니더라도, 윤리학자나 도덕학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겐 이렇게 주를 고백하고, 내 신앙을 실천하겠다는 신실한 고백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백과 실천이 없이 성경 상식이 풍부하고, 교회 생활의 경험이 많다고해서 구원의 삶을 산다고 착각해서는 곤란 합니다. 오직 예수가 나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가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게 이런 신실한 고백을 요청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구원의 삶을 살면서 나타나는 가장 큰 결과는 화평과 기쁨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를 고백하고 예배하고 찬양함에도 불구하고 행복과 평화, 사랑의 감정이 내 마음에, 내 삶에 살아 있지 못하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의심을 한 번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날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귀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구원의 경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단계를 경험하지 못하면 여전히 나는 곤고하다고 외치며 갈등하고, 고민하고, 낙심하고, 교회 출석에 나태해 지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시점에서 '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 맞는가?'라는 구원관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강제적인 사랑을 경험해 보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의 삶은 자신의 믿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성도는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신앙생활의 추구는 곧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는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런 삶의 스타일이 필요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의 틀이 깨져버리면 나의 구원관은 혼란이 오게 되고, 갈등하게 되고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결국 교회 출석을 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분명한 구원관을 가슴에 새기고, 명확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구원관은 그저 지식으로 배운 상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버리고 맙니다. 구원은 공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공부가 아닙니다. 경험입니다. 경험하지 못하는 구원, 경험하지 못하는 성경은 여전히 나의 신앙생활에 에너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삶을 위하여 분명한 고백과 삶을 소유해야 합니다.

 

1.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은 기독교인이 고백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내가 기독교인으로 사는 동안 분명하게 지식이상, 확고한 경험으로 내 삶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이 고백이 없는 신앙인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은 그냥 당연하게 내 중심에서 나의 믿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이 움직임이 신앙고백이 되고, 이 에너지가 내 삶의 동력이 되고, 이 능력이 나로 말미암이 이 교회의 신자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와 공동체를 섬기는 중요한 에너지 원(原)이 되는 겁니다. 왜 공동체가 무너지고, 깨지고, 싸움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는 줄 아세요? 무슨 말을 시작하거나,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너 구원 받은 사람 맞아?'라는 이 구원관이 먼저 작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인간의 구원적 확신 뒤에는 반드시 욕망, 이기심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관이 흔들리면 신앙적이지 못한 비신앙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아담도 자신의 분명한 신앙관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뱀이 '정말 그럴까?'라는 질문에 넘어가 자신의 욕망의 눈으로 보니, 하나님이 먹으면 진짜 죽으리라는 그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하게 보였던 겁니다.

 

롬5:6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경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습니다. 인간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기 때문에 혀는 속이고, 입술은 사람을 저주하고 독살스럽다고 성경이 말을 합니다(롬3:10-18).

 

이런 무자비한 세대에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다려 돌아가신 겁니다. 그 인류의 무자비하고, 무경건한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나입니다. 이것은 지식적이거나 논리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고백되어져야 하고, 경험되어져야 하는 분명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2. 기독교의 구원은 신앙인들의 삶에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들은 의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도 겁니다. 그런걸 보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의리 있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어?'라고 물어 보세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롬5:7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기는 겁니다. 아니, 어떤 댓가로 죽느냐는 겁니다. 나를 위하여 죽는다면 그만한 가치나 의미를 부여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그 대신해서 죽는 자체가 의미 있는 거라구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 자체로 의미를 찾아 승화한 적이 있나요? 죽음은 모든 것이 의미가 있구, 가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나만의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적어도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면 인류가 참 된 행복을 찾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기 사랑의 확증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에는 이렇게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의 요청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가 나의 구주라는 그 확증에 보답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롬5:6-9절까지의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 죄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걸 뭘로 보여 주시겠느냐구요. 감격에 가득 찬 예배로, 내 몸을 주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헌금합니다. 정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는 마음으로 봉사와 섬김에 사역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구원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잖아요? 쉽지 않습니다. 인색함, 형식적인 것, 귀찮아서, 희생? 대신하겠다는 마음? 섬기겠다는 마음? 이런 거 전혀 없습니다.

 

3.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함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하여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별다른 의식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면에서 제가 재미 있게 스토리를 구성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가 되셨다고 했죠? 그럼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화목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삐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화목일까요. 아닐까요? 화목이 아닙니다. 그럼 반대로 내가 삐쳤습니다. 이것도 화목은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화해입니다. 이 화해의 관계를 선명하지 않으면 나도, 하나님도 섭섭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롬5:10-11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과의 화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화해의 표시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자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려면 봉사, 희생, 수고, 애씀.... 뭐 이런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주를 위하여 뭐하나 해 주셨습니까? 교회를 위하여 뭐하나 해 주셨습니까? 함께한 군우들을 위하여 뭐 하나 해 주셨습니까?

 

이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신앙인이라면 화목, 화해, 이해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구원의 삶이 되지 못하면 인간의 도리도 실행하지 못합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렵니까? 나의 구원관도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적 표현도 명확하질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의 삶을 위하여 한 번 고민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내고 있는가?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내 영과 혼과 몸을 흠없이 보존하여 마지막 날에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그럼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지? 적어도 이런 구원의 삶을 위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2016년 우리 교회에 구원과 생명의 영이 역사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구원이 고민되고 갈등되는 것에서 벗어나 참 된 자유, 참된 구원의 삶을 찾을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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