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배하는 사람들에게...(12.6)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12-06 23:32 조회수 3275


설교제목 :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성경본문 :  요한복음 4장 20절~24절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5. 12. 06


요4:20-24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목회 하는 동안 예배에 대하여 정말 말씀을 많이 묵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관하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배에 대한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예배가 가장 좋은 예배인가? 어떤 예배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가? 성장하는 교회들은 어떤 예배를 하는가? 과연 생명력이 있는 예배란 무엇인가? 현대 예배는 나의 믿음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하나님 앞에 복 받을 만한 예배는 무엇인가?

 

그러나 예배에 대하여 그런 많은 질문들을 했지만, 여기에 대하여 신앙인 스스로 결단하고 참여하는 모습과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예배는 그 어떤 신앙의 표현보다 중요합니다. 예배는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표현 방법을 모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기도, 고백, 찬양, 드림, 말씀, 헌신, 파송 등 신앙인으로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가질 수 있는 모든 신앙의 방법들이 예배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참여하는 신앙인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신앙은 성숙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교회들은 줄어드는 교인들을 막고, 기독교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배의 방법들을 연구하고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한 가지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전통적으로 시행되는 예배 방법으로 돌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관람이나, 흥미가 아닌, 신을 향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쇼(Show)가 되고, 예배가 현대 신앙인들의 생활에 편리함을 제공하기 위한 장소로 변해 가는 것에 대한 회의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의 어떤 교회는 평일에 나이트 클럽을 빌려 그곳에 온 사람들에게 예배의 시간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즉, 세상에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여 찾아가는 예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교인들을 위하여 나이트 클럽에서 예배를 한다는 것이죠. 예배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생각으로 예배를 하려고 하는지를 끝까지 고민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기도 합니다.

 

예배가 사람을 향하여 다가섰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신령한 마음, 거룩한 예배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거룩’이라는 표어로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어떤 형식, 방법, 역동성, 거룩함도 다 중요합니다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소위 ‘예배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의 교회들이 한 때 예배의 갱신으로 몸살을 앓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소위 ‘열린 예배’라든가 ‘역동적 예배’, 또는 ‘참여하는 예배’를 만들기 위하여 예배를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를 했습니다. 강대상을 최소화하고, 설교자는 양복이나 가운 대신에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웬만하면 기독교의 상징이나 표식을 부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용어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예배와 문화에 접근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전통적인 예배의 형식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방법이 찬양과 경배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역동성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배의 갱신이 ‘예배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룩하고,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들은 예배가 세상으로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배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배는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전도를 하시러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게 됩니다.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버리고 이방인과 혼인하며,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처럼 섬기는 신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반역자들입니다. 배신자들이었습니다. 버러지보다도 더 못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땅 조차도 밟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네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침 저녁이 되어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가고 예수님 홀로 우물가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일어나는데 한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1. 예배는 누구에게 드려져야 합니까?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와 분명히 대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에 대하여 아주 심오한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의 주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예배하던 내력을 말합니다. 20절에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예배의 개념이 깨지는 겁니다. 자신의 조상들로 내려온 진정한 예배의 개념, 예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예배는 만남입니다. 날 구원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선포되는 말씀인 설교,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주의 음성을 듣는 수단입니다. 기도는 내가 주님께 문제의 요청과 부탁, 하소연, 내 속사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찬양은 감사입니다. 감격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하고, 감탄하고, 느끼고, 그리고 그에 대한 표시로 예물을 드리며, 주님과의 동행을 언약 받는 축도가 예배입니다. 이렇게 예배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이 없기에 예배가 소홀한 겁니다. 예배가 살면 모든 것이 삽니다. 예배가 즐거워지고, 예배가 감격이 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의 모든 문제가 바로 해결되는 겁니다.

 

예배할 대상을 바로 찾지 못하는 신앙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절에 가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 어디에서나 예배해도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곳, 하나님께서 마련하시고 나를 부르시는 그 곳에서 이루어 져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곳, 내가 원하는 대상에게 드려지는 것이 기독교인의 예배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예배, 지금 내가 생각하는 주님, 지금 내가 생각하는 신앙의 모습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존재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발견은 신령과 진정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신령”(프뉴마, spirit)은 하나님이 숨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의미합니다. 즉, 내 이성의 원리가 아니라 성령님의 원리에 따라야 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예배가 신령한 예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서 예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 여유 있는 시간, 여유 있는 장소에서 자신의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에 따라서 예배하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자꾸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소위 내가 하나님을 가르쳐 자신의 방법으로 예배를 성립시키려고 합니다. 어찌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합니까? 여러분 학생이 선생님 가르치면 좋습니까? 직원이 사장님을 나무라면 좋습니까? 자식이 부모님께 이래라저래라 하면 어떻습니까? 물은 아래로 흘러야 합니다. 질서는 있어야 합니다. 금방 호흡이 멈춰 죽게 된 사람이 응급 구조사의 말에 따라 호흡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호흡을 해야 숨통이 트입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참되게’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따라 예배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유행 따라 예배의 방법을 달리하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예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방식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말하는 예배에 나는 없고, 다른 사람만 있었습니다. 찬송은 입술과 성대가 하는 것이지 내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기도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잘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재능이지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예물은 아까움과 인색함의 극치였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을 이끌고, 예배를 이끌고, 예배를 조종하고, 다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앞에 순종하고, 말씀을 듣고, 따르고, 섬기는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보니 예배는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주관하시도록 내 마음을 내어드리는 것이 신령과 진정이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마 작정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이 날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려고 눈 빠지게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로또 복권은 당첨되는 것이 대박인줄 알면서 하나님 앞의 예배는 왜 대박인 것을 모르는지요. 신령한 마음을 찾고,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것이 그 어떤 복, 횡재, 대박보다 더한 행운이요, 복이요, 대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에게 참으로 예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23절의 말씀을 모세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참되게 예배할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직접적으로 풀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는 지금 여기에서 예배하는 여러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제 예배했고, 아까 예배했고, 지난주에 예배한 사람을 원하시고 찾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진실 되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의 모범 답안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참되게 예배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현재 진행형이 되어야 합니다. 그 옛날 아무리 화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할지라도 지금 예배가 엉망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 하나님이 복 주십니까? 오늘 여기에서 지금 예배하는 사람이 복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항상 예배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예배에 대한 생각이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가끔씩에서 열심으로 바뀌어 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여기에서 예배하는 내가 복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배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형통함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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