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배로 내 영을 살리자(11.29)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11-29 22:43 조회수 3108


설교제목 : “예배로 내 영을 살리자”
성경본문 : 로마서 12장 1절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5. 11. 29



롬12:1

예배로 내 영을 살리자

  

기독교 신앙인들이 무슨 말을 할 때면 ‘그것이 영적으로, 육체적으로’라는 말을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육체적인 것을 멀리하고,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많이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육체적인 사람, 세상 적인 사람이라고 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은 영혼이 맑은 사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영혼이 여전히 맑지 않은 사람은 세속적이고, 세상 적인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순수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고 될 수 있으면 기도하고, 말씀보고 경건함을 유지하려고 많은 애를 쓰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육체적이십니까? 아니면 맑은 영혼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체와 영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성경은 영혼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구약에서 ‘영혼’은 ‘숨을 쉬는 것’(네페쉬, soul), ‘호흡’이라고 합니다. 이 호흡이 육신을 존재케 하는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호흡, 숨을 쉬는 것을 ‘영’(soul)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기능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육신(body)과 영(soul)과 혼(spirit)이 있습니다. 혼은 육신을 존재케 하는 기능을 합니다. 영은 혼과 육신이 하나님을 알게 하도록 하는 기능을 합니다. 물론 칼빈의 견해는 사람은 육신과 영혼, 이 두 가지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영이 되었든 영혼이 되었든 이것은 사람이 육신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을 향하고, 고상한 것을 추구하고, 지고한 이성을 추구하고, 신을 찾게 하는 기능을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발달하면 신을 찾고, 육신이 발달하면 정욕(情慾)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신앙인들은 육신의 발달을 억제하고, 절제하는 훈련을 받고, 신앙적인 영역, 즉 영혼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신앙의 정진에 무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신약에 와서 ‘영혼’(프쉬케, 프뉴마, soul)은 육체의 반대 기능으로 표현을 했고, 육신의 반대인 마음을 의미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숨쉬는 존재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혼이 ‘신비주의’나 ‘미신적인 것’이나 ‘비합리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가장 기독교적이고, 성서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신앙적인 고백이 담겨져 있는 존재로 성경에서는 말해지고 있습니다. 영혼이 부패했다는 것은 이런 조항들이 모두 빠진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맑지 못하다는 것은 미신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성경적이지 못하고, 신앙적이지 못하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은 맑은 영혼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지극히 이성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주관에 빠지거나, 자기 변명하거나, 자기 고집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영혼을 살리는 예배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맑게 하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당당하게 숨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런 예배가 영혼을 살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예배, 세상도 이해할 수 없는 신앙, 성서에서 설명되어지지 않은 예배는 영혼을 살리는 예배, 즉 영적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1. 영혼을 살리는 예배가 되려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바치고자하는 ‘드림’(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드림’의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다’(offer)라는 의미는 자신의 영혼을 맑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잎에 선 내 마음’의 상태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확인이 없이는 마음도 없고, 표현도 없고, 드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뭔가 필(feel)이 꽂혀야 그 다음에 행동이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확실하게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난 잘 살수 있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내 영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잡았다면 이제 내 몸을 하나님께 그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도 있는 것입니다. 몸을 세상에 던지지 않고 하나님의 영역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은 더 맑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맑아지지 않으면 육신은 더 부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몸을 드리되 ‘거룩하게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결백하고, 순수하게, 다른 마음 없이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육신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존재로 설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육신으로서야 합니다. 섬기는 육신으로서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할 것 다하고 교회만 잠시 출석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결코 영혼을 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더러운 죄악의 껍데기를 주님의 사역을 통하여 한 꺼풀씩 벗겨내야 합니다.

 

2. 하나님과 내가 동시에 기뻐할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신앙으로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에 보면 ‘제물’(sacrifice)이 ‘제사’라는 말로 같이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제물이 ‘산 제물’(living sacrifices)이라고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산 제물’의 의미를 아십니까? 제물을 살아있는 채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말이 잘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산 제물’의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심청전 이야기입니다.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가 인당수에서 뛰어내리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산 제물, 산 제사의 대표적인 사례가 됩니다. 또 옛날에 순장(殉葬)이라고 해서 귀족이 죽으면 살아있는 몸종이나 아내를 같이 묻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제물을 바친다’,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단순히 동물을 죽여서 자신을 대신하여 신에게 바칩니다. 그런데 ‘산 제사’는 자신을 대신하여 다른 대체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즉, 시간이나, 생활이나, 어떤 영역에서든지 구애받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사는 그 자체를 하나님께 보이라는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데, 이것이 나의 영혼을 뺀 ‘물질’의 개념이 되면 안 됩니다. 영혼을 드리는 신앙고백이 빠지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결국 교회를 위하여 돈을 많이 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배를 해도 영혼이 없이 육신 껍데기만 여기에 와 있습니다. 억지로 끌려오다 시피 하여 여기에 있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기뻐할 만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나타납니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증거, 무슨 표시가 나타납니까? 내가 봐도 ‘이건 하나님이 기뻐하실 꺼야’라는 확신이, 자신감이 생깁니까? 그렇다면 그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은 삽니다. 하나님께 당당히 숨쉴 수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인은 만사형통 할 수밖에 없는 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영혼이 사는 예배는 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살려고 하는데 정작 영혼은 관계없는 육신의 자랑, 자기 삶의 자랑으로 예배가 되면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이라는 말을 다른 곳에서처럼 ‘영혼’의 개념이 아닌 ‘합리적인’(로기콘, reasonable), ‘말이 되는’이라는 말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을 제대로 해석하면 ‘이는 너희가 드릴 합리적인 예배니라’라고 하든가, 아니면 ‘이는 너희가 드릴 말이 되는 예배니라’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사는 예배는 이성적으로 말이 되는, 그야말로 합당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자기 생각대로, 자기 주관대로, 자기 고집대로 하는 예배는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에 빠져 예배하는 사람은 자신이 더 복잡한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맙니다. 자기가 만족하기 위하여 드리는 예배,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예배, 남들을 의식하는 예배는 공통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단과 사이비가 생겨나고, 신비주의나 주술적인 신앙행위, 미신적인 형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배를 평가하는 관람자의 자리에 앉게되는 교만의 극치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가장 쉽게 넘어 가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예배가 은혜가 안 된다는 둥, 예배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둥 참 많은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께 바로 서있다면, 즉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이 이성적으로, 성서적으로, 합당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영혼이라면 그 사람은 예배가 어떻든지, 죽을 쑤는 예배가 되었든지, 개떡같은 예배가 되더라도 은혜는 받습니다.

 

다만 예배를 집례하고 진행하는 사역자는 여기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지치고 곤한 영혼이 이 예배를 통하여 도전 받고, 영혼이 바로 서며, 맑게 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집례자의 영혼이 망가지면 예배도 망가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이 망가진 집례자, 영혼이 맑지 못한 순서자를 통하여 망가진 예배를 방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숨을 쉬기를 원합니다. 지금 내 영혼이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자유로운 호흡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영혼이 지금 이 예배를 통하여 맑아지고, 강건해 지고, 회복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병든 영혼, 좌절하고, 의심하고, 갈등하는 영혼들이 예배를 통하여 위로받고, 힘을 얻고 능력 받는 기회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영혼을 살리는 교회, 영혼을 살리는 예배, 영혼을 살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우리의 영혼을 점검하고, 우리의 영혼을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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