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결한 삶(10.25)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10-25 23:35 조회수 3099


설교제목 : “성결한 삶”
성경본문 :  야고보서 4장 7절~10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10. 25



약4:7-10

성결의 삶

 

 

여러분은 성결한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성결한 신앙생활입니까? 구세군인으로서 성결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보통 성경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카도쉬'라는 말로 나타나는데, '구별하다', '봉헌하다', '거룩하다', '깨끗하게 하다.'라는 말로 해석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따로 구별해 놓은 사람이나 사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성결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특별한 소유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고, 하나님이 쓰시는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성결은 '하기오스'라는 말로 번역이 됩니다. '신성함', '거룩함'으로 해석이 됩니다. 이 말은 성령의 내 안에 계셔서 나를 통제하고, 나를 주관하심으로 성결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특별한 도덕적인 행동도 성결에 해당이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결은 악과 부패를 근절시키거나 중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결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 곧 성결입니다. 그래서 성결의 삶은 주 앞에서 말씀 앞에서 순종하지 않으면 결코 실행되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거룩해 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편에서 악을 대항하며, 성결한 삶을 위해 늘 애통하며 숙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의 성결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교회, 주님과 함께하는 성결의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결의 경험을 통한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결한 신앙의 무장은 가장 먼저 자신이 가진 육신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릅니다. 즉, 육신의 정욕을 어떻게 다스리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사람은 욕심, 욕정, 욕망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고, 살인을 저지릅니다. 정욕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세상과 벗하며, 세상의 즐거운 것, 재미있는 것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한 번에 성결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를 '기도'에 두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여도 응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서든지, 사람을 향해서든지 자신의 정욕의 필요를 위해 구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방법이 잘 못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결한 삶의 시작은 정욕의 충족함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위한 필요 충족을 위해야 성결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이켜 보세요.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습니까? 시간이 지나 정욕에 목적을 두고 산 사람은 고독해 집니다. 그것이 친구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리는 정말 고독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시점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의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며 사는 은혜의 비결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결의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1. 성결한 삶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항복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목숨 줄을 쥐고 있는 대상이 나를 이긴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 목숨 줄을 잡고 있는 그 대상을 향하여 소위 목숨 구걸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참 많은 절차가 따릅니다. 복종해야 합니다. 명령하면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것도 투덜대지 않고 겸손하게 명령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4장 7절의 말씀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물 세계의 창조자, 보존자, 통치자 이십니다. 그러니까 천하 만물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만물이 주의 말씀을 거역하며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면, 세상은 더 일찍 종말을 고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과 구원의 의지가 강하시고, 그 참으심이 지극하시기에 오늘까지 자연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복종하는 단계가 성결의 시작이 됩니다. 복종하는 훈련은 정말 필요합니다. 순종하는 그 믿음은 평생 필요합니다. 하고 싶은 말도 참아야 합니다. 반대로 하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합니다. 그 참는 훈련이 성결한 신앙인이 되고자하는 첫 번째 관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참는 훈련만큼 힘든게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참는 겁니다.

 

아픈 것을 참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을 참아야 합니다. 투덜대는 교인들의 모든 것도 참고 받아 줘야 합니다. 먹고 싶은 것도 다이어트 때문에 참아야 합니다. 듣기 싫은 설교도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무던해 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결의 끝이 아니라 성결을 시작하는 단계가 되는 겁니다. 참는 것은 훈련입니다. 가만히 보면 성결의 삶은 이론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말씀을 드리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결이 훈련되어야만 하고, 끝없이 연습해야 하는 과정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성결한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8절의 말씀을 잘 보세요, 먼저 움직여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먼저오시지 않습니다. 성결의 삶은 내가 먼저 움직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신앙인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설 때, 하나님도 나에게 오십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오시면 나는 그 거룩함에 부정하게 되어 죽고 맙니다. 그러니까 부정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내가 하나님께 다가서면 하나님은 그 모습 그대로 나를 품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 없이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생활이 매우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부르고 매달리다가도 생활이 안정되고 문제가 없어지면 신앙생활을 흐지부지하게 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앙에서 떠나 주일도 잘 지키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람의 약점을 잘 알므로 신앙이 약해지거나 허점이 생기면 그 기회를 타서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어떤 이에게는 탐욕을 통해서, 어떤 이에게는 이성의 유혹을 통해서, 어떤 이에게는 분쟁을 이용해서 들어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불순종케 하고, 교만케 하며, 반역케 하고, 정욕적인 삶에 빠지게 하며, 원수 맺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마귀의 전략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멀게 만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가까이 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항상 성령께서 나를 주장하시고 사탄이 내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중에 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3. 성결한 삶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별된 삶이 필요 합니다. 현대 기독교인이 손가락질 받는 하나의 중요한 삶이 성결한 것과 세속의 삶을 구별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에 살지만 하나님의 성결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결이 품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세속과 구별할 수 있는 표시를 전혀 가지고 살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껍데기뿐인 기독교인에 불과합니다.

 

8절 후반에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했습니다. 세상에서 구별되지 못한 것들은 이제 손을 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핸드폰 바탕화면에 고스톱이 깔려 있습니다. 전철을 타보면 여기저기서 '짹, 짹' 소리가 납니다. 무슨 소리? 인터넷으로 고스톱 치는 소리.... 이건 좀 곤란하지 않습니까? 아니 고스톱도 신앙의 여유를 찾은 후에 여가로 하는 것 말리지 않습니다. 아니 무슨 고스톱으로 구원받을 일이 그렇게 많은지 말이죠.

 

말하는 것, 옷 입는 것, 노래하는 것, 스마트 폰의 바탕화면을 보면 대충 그 분의 신앙적 성향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왔지만 예배가 안 되는 분들, 교회에 놀러 오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가서 교회의 비판을 가장 많이 합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 때로는 신앙인을 말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과 신앙의 삶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좀 참으세요. 신앙적인 것에 열심을 더 내세요. 주님이 은혜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4. 성결한 삶은 겸손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성경 전체에는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흐르고 있습니다. 욥 22:29에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도 마23:12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능력 없음을 인식할 때에만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빈곤은 인식할 때에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필요한 일에 대한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할 때에만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게 되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인생을 이겨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 때에만 모든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해집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해주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이 교만할 때는 자신이 부족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찬양을 자기에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볼 수 있는 것같이 자칭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인 양 교만하다가 망신을 당하곤 합니다. 교만한 자는 독단을 고집하며 누구의 지시도, 명령도 거부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거부합니다. 교만한 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치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만 내립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연약한 속성을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한없는 사랑을 부어 주시는 것은 인간이 의롭고 지혜로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속성을 지니셨기에 인간들의 연약함을 안쓰러워하시며 한없는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연약한 중에도 하나님께로 좀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몸부림치며 한계를 고백하고 도움을 빌 때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기도를 저버리시지 않습니다(참조, 사 57:15).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전존재를 열어 보이며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를 통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은 지극히 겸손한 자들을 당신 나라의 주인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겸손은 이론적인 앎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힘들고 어려운 덕목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 아래 나가는 길은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신앙뿐입니다. 성결은 훈련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성결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결한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 땅에 펼쳐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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