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교회 성장의 엔진(9. 20)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9-20 14:06 조회수 3075


설교제목 : “교회 성장의 엔진”
성경본문 :  사도행전 2장 29절 ~ 41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9. 20



행2:29-41

중생과 교회성장

 

 

중생은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죄악의 사람에서 주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과거 모든 죄악의 기억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과거의 행동이나 버릇, 몸에 베인 습관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어떻게 제거해야 하죠? 회개와 믿음을 가짐으로 사람은 주님의 성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찔림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즉, 모든 언행에 있어서 뜨끔뜨끔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찔림이 없으면 회개가 없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확신도 없어지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는 성결의 삶도 없습니다.

 

늘 생각하기를 ‘내가 뭐 어때서?’라고 말합니다. ‘나 같은 사람 또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찔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향한 부족함의 발견, 자신의 부족함의 지적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부족함을 더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서서히 찔리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생기려는 사람은 슬슬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아하, 이게 내가 뭔지 잘못되어 있구나"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예전엔 교회에 나와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슬슬 뭔가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뭔가 좀 더 정리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 진정한 신앙생활인가?'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보게 됩니다. 성경을 보게되니 왜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습니까? 그래서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게 됩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거꾸로 진행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연히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기막힌 진리가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진리를 좀 더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모든 죄의 문제를 고민 없이 단번에 해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비판, 자신에 대한 죄의 문제의 발견이 없이는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믿음도 불가능합니다. 거듭남도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반드시 회개와 믿음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신뢰의 대상을 찾을 수 없는데 어찌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까?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새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자신의 삶을 위해, 예수 없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예수의 진리에 말씀에 비춰보니 찔립니다.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잘못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교회의 한 자리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찬송과 기도가 나옵니다. -찬양-“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라는 찬송이 내 마음을 울리기 시작합니다. 이제야 주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합니다. 이제야 문제가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은 나를 용서할 수 있지만 내가 지은 죄는 누가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대상도 없이 지은 죄, 사람들에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삶 속에서의 죄들을 누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것은 신이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무릎꿇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의뢰하고 해결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과정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죄 용서 받을 수 없는 수천만 가지의 죄들을 해결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벧전1: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 인생과 삶의 문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의 용서를 받고, 예수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확신하고 경험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삶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한턱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밖에 없고, 그 비결을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흥이 시작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요, 그 삶의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는 겁니다.

 

‘빛 좋은 개살구’가 있습니다. 보기에만 좋지 맛은 형편이 없습니다. 요즘에는 먹을 수는 없지만 보기 좋게 하기 위한 음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선 안됩니다. 보기는 좋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속에는 회개도 없고, 구원도 없고, 거듭남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와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못 박혔다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그 부활을 본 사람들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주의 부활을 본 사람으로서의 증인이 되게 해 달라고 힘껏 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희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전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여러 나라의 말들을 저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뭉게지 못하도록 뜨겁고 열정적인 마음을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에 무식한 사람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꿰뚫어 어느 유식한 사람보다 더 유창하게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합니다. 당시에 가장 유식한 사람은 수학 공식이나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이나 성경을 잘 풀어 들려주는 사람이 가장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무식자 중에서 상 무식자들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어쩌면 그 어느 유식한 사람들보다 훨씬 실력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모세의 율법을 풀어주면서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이 살리셔서 하늘에 올리시고, 지금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다고 행2:33절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을 들은 사람은 가슴을 쳐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가장 중요한 엔진은 회개의 마음입니다. 가슴을 치는 마음입니다. 29절부터 36절까지에 보면 베드로가 복음을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가슴을 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베드로의 복음을 듣고 몇 가지 반응을 합니다. 하나는 들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으면 변화도 없고, 성숙도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자라고, 삶이 변화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베드로의 설교를 모인 사람들의 귀에 들렸습니다. 이것은 지나가다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부하직원이 보고하는 것처럼 자세하게 들렸습니다. 처음듣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귀에 익숙한 말씀으로 청중들에게 들려진 겁니다.

 

귀에 들린 말씀은 가슴에 찔려야 합니다. 우리의 피부 겉에만 따끔하게 찌른 것이 아닙니다. 속살을 파고들도록 심하게 찌른 겁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쿵쿵 뛰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마음이 찔리고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경험 말이죠. 이것은 입술로 고백하지 않으면 영원한 상처로, 후회로 남습니다. 그래서 멋있는 사람은 아주 빠르게 고백해야 합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이 주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일들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말릴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내가 아무리 말렸어도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외침은 필사적이었습니다. 애통하면서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가를 외쳤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똑똑하게 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자극해야 합니다. 아니 자극보다 더 강한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이 많은 공동체, 교회는 성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뜨거움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엔진을 더욱 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불이 됩니다. 이것이 말씀 연구의 불이 됩니다. 이것이 전도의 불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불이 됩니다.

 

2. 베드로가 담대하게 복음전함에 대한 처방을 내립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뉘우치지 않으면 죄사함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 자신의 인격의 변화를 요구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의 확신을 통하여 내 죄가 용서함을 받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겠다는 절박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찔림의 현상은 회개입니다.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소위 하나님 앞에 ‘배째라’하는 겁니다. 이제 내 능력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용감해지세요. 하나님 앞에 뭘 드러내고 자랑할 것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어떤 미련한 사람 하나님 앞에 건강 자랑합니다. 주책없는 사람 하나님 앞에 돈자랑 합니다. 푼수 오반장은 명에, 자식자랑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랑이 아니라 맡김이 필요합니다. 맡기면 힘을 주십니다. 맡기면 해결책을 주십니다.

 

3.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풍성함으 비결입니다. 교회성장의 비결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어디에서 옵니까? 인간의 활동이나 재물, 능력은 분명히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어떤 사회적 단체처럼 이슈가 있고, 재정적인 능력발휘나 사회적 이미지에 그 원천을 둡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부흥의 원천(源泉)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하고 믿음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활동력에 의해 사람이 늘어나고, 물질적인 바탕도 형성되고, 재능의 발휘도 나타나는 겁니다. 교회 성장의 원동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가 되시며 그분이 내 안에서 나를 통치하신다는 확신에 찬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교회는 충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계획이 필요하고, 전략도 필요하다. 언어는 그 다음입니다. 아무리 말을 많이 하고 행동을 구체화하겠다고 모의를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한, 그 교회는 늘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삼천이나 된 그 뒤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말이 있었던 것 아닙니다. 어떤 구체적 행동이나 물질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말씀 듣는 것도 그렇게 시원찮고, 기도를 합니까? 전도를 합니까? 사랑이 있습니까? 그 사람 옆에만 가면 손 베이게 생겼습니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분명히 아닙니다.

 

우리교회를 움직이는 엔진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를 움직이는 엔진의 배기량은 얼마나 될까요? 경차? 소형차? 아니면 대형차? 여러분의 신앙의 엔진이 강하고, 힘차고 역동성있는 성령의 불의 엔진을 소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거듭난 사람, 은혜의 사람, 회개와 믿음의 사람들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살찌우고 부흥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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