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9. 13)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9-13 15:03 조회수 3307


설교제목 :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성경본문 :  시편 86장 1절 ~ 9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9. 13



시86:1-9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개념은 구약성경 처음부터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도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 합니다. 보통 다른 종교는 신이 사람에게 신탁(神託)되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합니다. 즉, 신이 어떤 꿈을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합니다. 또는 사람의 몸을 빌어서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신이 인간과 인격적인 교제나 교류가 아니라 일방적인 방법을 통하여 영적 교제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을 선택하여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선택한 사람과 충분하게 교제하고, 이해시키시고, 설득시키시고, 말씀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순종하고, 전하도록하십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종교와 기독교가 신을 만나는 방법의 차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제일 먼저 무슨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 때 가장 많이 써먹는 것이 기도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의 죄와 무능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 해결을 요구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확실한 결과를 듣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을 내 삶속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기절할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배운대로 차곡차곡 주님과의 만남을 더욱 길게 이끌어 갈 겁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주님 만나면 기절할 스타일이십니까? 아니면 주님 만나면 그 만남을 원 없이 이끌어 가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입장이 어떤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아뢰어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합니다. '나 지금 주님을 만난다면 코 좀 높여 달라고 할까?' 아니면 '나 지금 주님 만나면 아파트나 한 채 달라고 해 볼까?'라는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의 요청거리를 생각합니다. 지금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물었습니다. '너 뭐가 필요하냐?'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전 주님 한분으로 만족합니다.', '아니면, 전 주님이 제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좋아 하십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삶을 사시는 동안 하나님은 레이저 눈빛으로 우리를 지키실 겁니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귀로 저와 여러분의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실 겁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가 주님을 소유하게 한 겁니다.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을 지켜 주십니다.

 

그런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겠다는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의 신앙이 주를 향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우리를 살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능히 뛰어넘고,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고 이끄십니다.

1. 가난하고 궁핍에 처해 있는 신앙인을 향해 주님은 귀를 기울이십니다. 1절의 말씀에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두 가지의 자신의 상태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가난하다는 겁니다. 옛날 성경에는 '곤고하다'고 기록합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심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너무도 악조건인 상황임을 주님께 고백합니다. 즉,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정말 어려운 상황임을 고백합니다. 또 하나는 얼마나 그 고통이 심한지 굶고 헐벗은 상황임을 주님께 비유하여 고백하는 겁니다.

 

지금 내 심정이 이래야 합니다. 지금 내 상황이 이래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절실하게 무릎꿇고 간구할 수 있는 겁니다. 내 마음이나 내 생활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을 절실하게 부르지 않습니다. 이건 아직 급하지 않은 겁니다. 아직도 살만한 겁니다. 왜요? 아직까지 여러분의 주변에 도와주는 손길이 남아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아직도 주님 앞에 무릎 꿇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있으신 건가요?

 

다윗은 이제 가난의 표현을 뛰어 넘어 '궁핍'의 단계까지 갑니다. 가난한 것과 궁핍한 것은 그 의미로 보면 비슷합니다. 그런데 궁핍은 가난함을 넘어서 거의 버림받은 지경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정말 신이 구원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자신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겁니다. 뭐하나 내 손에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빈손입니다.

 

그럴 때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이것보다 더 큰 기도가 있습니까? 이것보다 더 큰 요구가 있습니까? '하나님 내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하나님 내 부탁 좀 제발 들어 주세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이제 부탁들 들어 줄 대상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그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그 가난한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간절함을 아십니다. 주님이 귀 기울이고 계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기도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2. 믿음을 표현하는 경건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귀 기울여 듣고자 하는 음성을 세상의 음성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2절의 말씀을 보세요.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누가 경건하다구요? 네. 다윗은 자신이 스스로 '나는 경건합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에는 "나는 당신께 바친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표준 새번역에는 "나는 신실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나는 주께 헌신한 자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경건합니다.'라는 다윗의 표현은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예배를 잘합니다.'라는 수준을 뛰어 넘습니다. 소위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맘대로 하라는 겁니다. 어차피 주님께 바쳐진 몸, 살리던 죽이던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생명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그만큼 깊은 영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꼭 생명의 관계가 아니더라고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진데, 이왕이면 주님께 매달리다 죽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습니까? 물론 주님은 나를 죽이시지 않고 아주 멋진 신앙인으로 되살려 주시겠지만요. 어떻게 보면 기도는 신앙인이 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입니다.

 

신앙인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신앙인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신앙인의 경건의 표현입니다. 신앙인에게 경건함이 사라지면 예배가 '의미 없음'이 되어 버립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도, 아니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밑에서 잡담하는 사람, 어느 곳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이건 경건의 표시가 아닙니다. 대예배는 중요하고, 오후예배나, 수요예배, 구역예배는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떤 예배는 대예배고 어떤 예배는 소예배입니까? 어떤 예배이든지, 어떤 모임이든지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예배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함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경건한 사람입니까? 기도하세요. 분명히 하나님이 귀 기울여 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3. 부르짖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전부 '귀를 기울여 주소서',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소서', '귀담아 들으소서'하는 말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만큼 부르짖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응답을 하신다는 겁니다. 6절의 말씀에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공동번역에는 "야훼여, 내 기도 들어 주시고 이 애원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으소서."라고 번역합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은 " 주님,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여호와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절히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원하고, 간절히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기도도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애간장을 녹이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예배를 많이 인도합니다. 기도회도 많이 인도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날 예배나 기도회를 인도할 때면, 제 설교가 저 공중으로 가다가 여러분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립니다. 어떤 때는 여러분이 열정적으로 기도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찬양과 기도 소리가 금방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몇 사람이 모이지 않았지만 그 기도소리가 살아서 움직입니다. 얼마나 우렁찬지 기도하는 그 장소를 들었다 놨다 합니다. 주의 성령이 임재하시는 영감을 확확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애절하게,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께 간구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시는 시간이 단축이 됩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께 애절하게 부르짖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하여, 이 교회의 영적 성숙을 위하여 기도하길 원합니다. 정말 애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실 수 있도록 간절함으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4.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인정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삶을 책임지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8-9절의 말씀을 보세요.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절의 말씀을 보세요.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나의 환난당하여 고통 중에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같으신 분이 없다는 겁니다. 주의 지으신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릴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만물의 창조자 보존자 통치자이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고백하는 그 경건한 신앙인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겠습니까? 조르고 조르면 됩니다. 간구하고 간구하면 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됩니다. 왜요? 이거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천국까지 이끌어 주시기로 약속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보호자로, 나의 인도자로 나와 약속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확신하고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아니라구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신구약을 합하여 수천 년 동안 주님을 따른 사람들은 진작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신실한 사람들의 간증과 삶의 모습들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하십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귀 기울이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에 주님께서 귀를 기울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맘에 드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실 수밖에 없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밖에 없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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