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메아리가 있는 이유(9.6)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9-07 23:03 조회수 3214


설교제목 : “메아리가 있는 이유”
성경본문 :  출애굽기 2장 23절 ~ 25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9. 06



출2:23-25

메아리가 있는 이유 

 

여러분 산에 가셔서 '야호'하고 많이 외쳐 보셨죠? '야호'하고 외치면 잠시 후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왜 그래!'하고 소리가 납니까? 아니면 내가 외친 '야호'라는 소리가 메아리쳐 들립니까? 물론 어떤 곳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내가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이런 현상을 '산울림'이라고도 합니다.

 

높은 산이나 도시의 빌딩에서 소리를 전하면 그 소리가 어느 반사면에 부딪혀 다시 돌아 오는 소리를 산울림 또는 메아리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메아리가 어떻게 생기는지 사람들이 잘 알 수 없어서 그 소리를 산신령의 목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에코(Echo)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숲의 요정 에코는 나르키소스(Narkissos)라는 미남청년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거절당하자 너무나도 안타까워 상사병에 걸립니다.

 

먹지도 못합니다. 몸은 점점 야위어갑니다. 결국은 그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나르키소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그 소리만은 그대로 남아 지금도 자기를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대답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에코는 메아리라는 뜻으로 번역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항상 질문과 대답이 있게 마련입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외침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외침에 반듯이 응답해 주십니다. 가끔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구절로 '침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설교를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셨다고해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하시는 겁니다.

 

예언자의 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왕이 선정(善政)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때는 예언자들이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폭정(暴政)을 하면 하나님은 예언자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과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나를 통하여 진행되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계획을 벗어나면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을 통하여, 환경을 통하여, 계시를 통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날 향하신 구원과 응답의 계획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고통과 눈물과 한숨소리도 들으실줄로 믿습니다. 애굽의 왕이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아져서 반역을 하면 애굽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를 마음대로 낳아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애굽의 자손 말살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레위 사람 중에 한 가정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들을 키울 수가 없어 나일 강에 버렸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애굽의 왕 바로의 딸이 그 아들을 주워 아들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유모에 의해 키워졌습니다. 그 유모는 자신의 가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키워진 아들을 이스라엘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지도자로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한편 애굽은 여전히 수많은 노동으로, 학대로 고통을 당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정말 중요한 한 대목에서 시작을 합니다. 23절의 말씀을 보세요.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모세를 잡기 위해 끈질기게 뒤쫓던 형제인 투트모세 3세입니다. 그 왕이 죽고 아멘호텝 2세가 왕이 됩니다. 모세는 이 왕과 대결하여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이 때까지 이스라엘은 정말 처참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참 큰 교훈과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신음소리, 고통소리도 기도소리로 들으신다는 겁니다.

 

1. 기도의 응답은 부르짖어야 합니다. 23절의 말씀을 보세요.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도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기도라는 말은 '파랄'이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르짖었다는 말은 '자아크'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기도했다는 말과 소리를 냈다는 말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 힘들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소리를 지른 겁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하지 않고 고통스런 외침만 있었을까요?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소위 요셉 덕분에, 편하게 살아온거죠.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을 철저하게 부르짖고 그 영향으로 이스라엘의 적은 무리가 그동안 편안하게 살아 온 겁니다. 그런데 요셉도 죽었습니다. 요셉의 믿음을 인정했던 애굽의 왕도 죽었습니다. 약 40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까 13세대가 바뀐겁니다. 그만큼 신앙이 없어진거죠.

 

출1:8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렸다"고 기록을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요셉의 역사는 알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역사는 후대에 전달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점점 더 식어져갔고, 400년이 흐른 지금은 거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살아질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육체적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엄청난 시련에 기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가 육체적 고통의 부르짖음의 형태가 되지 않았는지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하나님께 그 부르짖음이 상달되었습니다. 누구에 의해 전달 된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귀에 들린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은 누구를 통하여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바로 주님의 귀에 들립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직접 듣고 계십니다. 비록 기도가 아니라고해도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소리라면 우리 주님은 응답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2.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대상이 들어도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셔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24절의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고통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분명히 응답해 주십니다. 확실하게 끝장을 내 버립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알만큼 복을 주시겠다. 네가 복덩어리가 되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대를 이어 이삭과 야곱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걸 기억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 섞인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650년 전 그 언약을 기억하신 겁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가 600년 전의 사건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 오래된 약속이지만 귀하게 여기시고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속을 변함없이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 어떤 대상도 이렇게 오랜 기억속의 약속을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하십니다. 600년 된 그 약속을 지키실 뿐 아니라, 2천년이 지난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을 책임지실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누구에게 하소연 할 때가 아닙니다. 그 시간이면 기도하십시오. 사람에게 기도하고 요청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요청하세요. 분명히 우리 하나님은 들어주시고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떤 복음성가 가사처럼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나의 작은 한숨에도 응답하십니다. 나의 작은 눈물에 응답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홀로 두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은 회복시키시고, 고치시고, 치료하실 줄로 믿습니다.

 

3.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해결 받지 못합니다. 25절의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을 굽어 살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해결사로 지명합니다. 그 사람이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의 어려운 형편을 보시고 모른 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가 가진 문제를 위하여 해결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액션을 취하는지를 하나님은 살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애처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어, 저놈 봐라! 그래도 꿋꿋하게 일하려고 하네!"하면서 기특해 하시거나, '야, 너무 힘들겠구나 내가 좀 도와 줘야지'하는 동정심을 발생시켜야 합니다. 지나치게, 얄밉게, 뻔뻔스러우면 곤란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얄미운 것도 다 사랑으로 감싸주시면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열심 있는 신앙인은 그 열심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얄미운 사람은 얄미운 대로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짖기 바랍니다. 기도는 메아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메아리입니다. 표현하면 표현하는대로 큰 은혜로 해결되어 돌아 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군우들이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경험하시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메아리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산울림의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세상에 선하게 응답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도 아시고, 말 투도 아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께서 늘 응답하시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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