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세군의 사명(7.12)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7-14 01:17 조회수 3246


설교제목 : “구세군의 사명”
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7. 12



벧전3:13-17

구세군인의 사명

 

 

 

 

올해가 구세군 창립 150주년입니다. 150주년이 된 구세군이 지금쯤 그 존재 목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세군의 존재 목적은 모든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구세군(救世軍, The Salvation Army)입니다. 구세군은 세상을 구원하여 주님의 군대로 삼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구세군이 영혼구원의 목적이외에 어떤 것으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구세군이 교회입니까?'라고 물으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예 교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세군이 사회복지 단체입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럴 땐 이렇게 대답하셔야 합니다. '구세군은 선을 행하는 교회입니다.'라구요.

 

구세군은 19세기에 영국의 극한 경제 공황의 시대가 만들어낸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빵이 없으면, 선함이 없으면, 이웃과 함께하지 않으면 저들을 구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구세군이 탄생한 겁니다. 왜, 다른 교단이 없어서요? 절대로 그건 아닙니다. 구세군이 아니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사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구세군이 세워진 것입니다.

 

빵이 필요한 사람에게 빵을 제공해 주고, 일거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구세군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구세군에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할 조건이나 요건이 아닌 무조건적 제공이 구세군의 할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 이웃의 필요에 충족을 위해 사역에 집중하다가 보니 구세군의 사회봉사, 요즘엔 사회사업이라고 전문화 되어 있습니다만, 그렇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필요를 채움과 동시에 구세군은 복음의 필요성도 제시를 해야 합니다. 구세군은 1865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에 의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빵이 필요한 것입니다. 빵을 위해 복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목적이 뒤바뀌어 버리면 구세군의 존재 목적이 흔들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구세군의 선한 행위의 결과로 복음이 제시되느냐, 아니면 구세군의 선한 행위가 복음의 본질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의 본질이 선을 행하는데 있다면 우리는 그 선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복음 따로, 선한 행위가 따로 분리 되어선 안 됩니다. 구세군은 복음과 선한 행위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교단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본질에 그 선함이 구세군의 봉사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1. 구세군인의 사명은 선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데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열성이 담기지 않았거나, 뜨거운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형식이 되고 맙니다. 형식은 일회성 행사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일회성 행사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해 놓고 생색이나 낸다구요.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할거면 하지 말자고 합니다. 그 한 번이 또 한 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은 열심과 열성, 뜨거운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심'은 열정적인 것을 말합니다. 정말 하고 싶어서 안달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한 일에 열심당원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구세군의 사명은 선한 일을 꾸준히 하는데 있습니다. 구세군이 지역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도 중요합니다만, 저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워 주는 것이 더 필요 합니다.

 

그래서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19세기에 귀농정책, 실업자를 위한 공장, 가정 폐품 수거, 협동조합, 빈민굴 봉사, 이동병원, 범죄자 갱생보호소, 알콜중독 보호소, 성매매 여성 방지, 거리의 부랑아들을 위한 보호소, 실업인 학교, 정신질환자를 위판 보호시설, 주택 개량, 빈민은행, 무료 변호사, 결혼상담소 등등 정말 많은 사업들을 전개했습니다.

 

이렇게 사회봉사 시설을 윌리엄 부스가 주장하고 실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을 행하기 위한, 즉 복음 전파를 위한 그 목적 하나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선을 행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선'(아가도스)는 하나님의 본질적 선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행위적 요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의미 합니다. 즉,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선함을 보여 줄 수 있는 경지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적 극치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품지 않으면 실행이 불가능 한 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구세군인들이 선을 행하고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구원의 거룩한 열매를 품지 않고서는 절대로 실행할 수 없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습니까? 그럼 그 구원의 열정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말한 지고의 선, 이데아의 지경, 신의 마음을 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동냥질에 응하는 적절한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은 구세군인들의 봉사가 이 사회에 풍성하길 원합니다.

 

2. 구세군인의 사명은 복음을 만들어 내는데 있습니다. 복음을 만들어 낸다고 하니까 어감이 이상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은 순수한 복음을 생산해 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세상이 교회에게 손가락질 합니까? 그들의 삶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제를 하거나, 사회봉사를 하거나, 어떤 사역을 해도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랑을 위하여, 자기 업적을 쌓기 위하여 행하는 삶이 위주가 되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당하는 겁니다.

 

국제적으로 구세군이 150년 동안 사회구원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110년 가까이 사회구원을 위한 사역을 했습니다. 복음을 통한 사회구원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100년 동안 사회봉사를 위해 그 추운 거리에서 구제와 봉사에 임했습니다. '자선냄비 두 시간? 그까짓 거?'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자선냄비에 참여한 사람들은 보람을 느낍니다.

 

어떤 교단이나 단체에서 100년 동안 모금과 구제를 해온 곳이 있습니까? 대부분 일회성입니다. 어떤 곳은 기관 단체와 연합하여 좀 더 쉬운 모금 방법을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만, 길거리에 나가 세상과 함께하는 교단은 구세군입니다. 그것은 그곳에 복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과 희생과 섬김이 없이는 간단하지만 '자선냄비' 두 시간도 참여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을 보세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말씀합니다.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한다구요? 거룩한 사람이 하는 겁니다. '거룩'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항상 준비해야 할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에 담겨있지 않으면 그 어떤 선행과 사랑의 실천이 있더라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묻기를 '왜 하필이면 구세군이십니까?'하거든,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구세군입니다'라고 대답하세요. 복음의 바이러스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는 당당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묻기를 '왜 하필이면 구세군이십니까?'할 때, '좋은 일하잖아요.'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묻습니다. '구세군만 좋은 일 하나요?'라고 물으면 거기에서 우리는 주춤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좋은 일도 하는 겁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당연히 좋은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과 선한 삶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단어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 따로 선한 삶이나 봉사 따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단어 모두 다 하나님의 본질적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세군이 피곤한 겁니다. 그저 나의 구원의 삶을 유지하면 되는데,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내 삶을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의 사명을 목숨 걸고 감당하는 구세군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3. 구세군인의 사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구세군을 바라보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나로 인하여 세상의 한 구석이 변할 수 있다면 나를 주의 신실한 사역자로 불사를 수 있어야 합니다. 16절의 말씀을 보세요.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선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은 변합니다. 내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선한 행실을 추구하며 살면 나 자신이 변할 뿐만 아니라, 가정이 변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변합니다. 이웃과 사회가 변합니다. 바로 이것이 구세군인이 해야 할 중요한 사명입니다. 양심은 도적적인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인간의 의식이나 지각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앞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인간의 의식이나 지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지각, 하나님의 마음을 내 속에 이식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손가락질하는 세상의 사람들이 주께로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구세군이 이런일 하는 겁니다. 구세군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나와야 합니다. 구세군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복음이 세상에 전달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통하여, 구세군을 통하여 세상에 순수하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구원입니다. 이것이 구세군이 말하는 사회봉사 신학입니다. 이런 분명한 사명이 없이 구세군이 사회봉사 단체로 불려져서는 곤란 합니다. 사회봉사는 세상에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단체도 의식만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원을 위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곳은 쉽게 탄생할 수 없습니다.

 

구세군이 21세기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조금도 왜곡없이 전할 수 있는 복음적 교단이 되길 원합니다. 선함과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수이지만 변하지 않는 진실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구세군의 사명이 지켜 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구세군인으로서 당당히 외칠 수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 마음을 소유한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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