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도의 도리(6.28)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7-04 16:05 조회수 3367


설교 제목 : “성도의 도리”
성경본문 : 히브리서 10장 22~25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6. 28



 

 

히10:22-25

성도의 도리

 

 

 

'도리'는 "사람이 지켜야할 바른 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훈"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물의 정당한 이치"를 도리라고 합니다. 성도는 "성결", "거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도리'는 "성도로서 지켜야 할 바른 길"을 의미 합니다. "성도로서 정당한 이치를 행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입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도리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성도로서 지켜야할 바른 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죠. 예를 들면 주일성수를 하는 것, 헌금 생활을 잘하는 것, 봉사와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주일 성수를 잘 하십니까? 주일은 잘 지키는데 그냥 왔다가 그냥 갑니까? 자신의 영혼을 힐링하고, 도전을 받고 감동을 받고 돌아가십니까?

 

헌금을 해도 덜덜 떨면서 하십니까? 아니면 주님을 위하여 당연한 믿음의 표현으로 하십니까? 하나님께 인색하면 하나님도 여러분에게 인색하십니다. 봉사를 해도 싸워가면서 하시는 편이십니까? 아니면 서로 위로하며 도우며 칭찬하면서 봉사를 하시는 편이십니까? 그 사람이 끼면 꼭 판이 깨진다는 소문을 듣는 편이십니까? 아니면 내가 있어야만 일이 된다는 소문을 듣는 편이십니까?

 

성도로서 사역을 해야 하는데 이왕이면 거룩하고 성결하게 할 순 없을까요? 믿음을 가지고 사역을 하는지 의심해봐야 할 정도가 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성도로서의 도리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성도의 도리를 말하는 곳이 너무도 많습니다. 직분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헌금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예배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등등 너무도 구체적으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경대로 살 수 없는 걸까요? 그건 우리가 '성도'라는 기본 바탕이 잘 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는 초석이 예수 그리스도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성도라는 말의 기본은 예수 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초석이 "교회에 가서 친교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으면 곤란합니다. 옛날에 제가 교회에 다닐 때 학생, 청년들을 전도하는 방식이 우리 교회에 멋있는 오빠, 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여자친구, 남자친구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경로가 잘 못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이성을 찾아서 교회에 나오다가 구원 받는 사람이 있다고들 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그래서 한 때 교회는 연애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결국 그런 교회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복음이 전제되지 않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지 않는 교회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오늘 성경은 믿는 사람으로서 신앙적 도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도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의미로서의 '도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소위 자신이 성도로서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교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뭐가 잘 못되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1. 성도의 도리는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믿음을 가졌는데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정말 변하지 않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까? 2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심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양심이 더러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학에 보시면 신은 사람의 마음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다, 없다에 따라 바른 사람이냐 아니냐를 구분 짓습니다. 왜야하면 그 양심에 하나님이 자리잡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있다, 없다로 말하지만, 그것을 '비양심(非良心)이라고 합니다. 즉, 양심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말을 합니다. 좀 더 깊게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계시냐 그렇지 않느냐를 말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는 선한 양심에서 시작을 합니다. 심보가 잘못되면 생각이 잘못됩니다. 생각이 잘못되면 말이 잘못 나옵니다. 말이 잘못되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이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아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까? 신이 자리 잡지 않은 그 양심은 아무리 사람이 선하게 살려해도 비양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자리 잡고, 내 마음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온전한 믿음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아무리 땅을 팔아 주님을 향해 드려보세요. 그 마음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아까워하고, 숨기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량만큼 신앙인들은 물질도 드리고, 봉사도하고, 예배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일을 성수하는 만큼 되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일 오후예배나, 수요일, 금요일 기도회를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 교회의 군우들은 딱 주일 오전예배만 참석할 수 있는 믿음만을 가진 건 아니시죠?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께 설 수 있는 행동이 생기는 겁니다. 마음에 없는 하나님, 마음에 없는 교회, 마음에 없는 목회자에게 여러분은 어떤 표현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주의 몸 된 교회가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목회자가 담겨 있기를 바랍니다.

 

2. 성도의 도리는 소망을 주며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무엇이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사람의 말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크게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될 수 있으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가면 놀부 심보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남 잘되는 것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놀부 심보가 뭔지 아니죠? 흥부전에 보면 놀부의 심보가 나타납니다. 많이 있지만 제가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초상집에 가서 노래하기, 불붙는데 부채질하기, 호박에 말뚝 박기, 아이 밴 여자 발로차기, 우는 아이 똥 먹이기, 똥 싸는 놈 주저앉히기 등등 무척 많습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에는 없는 줄 아십니까? 괜히 심정 상해서 해코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죠. 잘한다고 격려는 못할망정 싸움 한 번하자고 붙어서는 안 됩니다.

 

23-24절의 말씀을 보세요.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신앙을 굳게 잡읍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우리의 바탕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면 흔들립니다.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니까 줏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줏대를 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떠난 자기 마음에 줏대를 심으면 이기적이 되는 겁니다. 욕심이 됩니다. 자기 자랑이나 자존심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맘대로 안 되면 뭔가 불끈 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꺾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래서 어째 마음이 풀리십니까?

 

하나님은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도리입니다. 이왕이면 잘했다고 해 주세요. 이왕이면 축복해 주세요. 이거 뭐 이기겠다고 바득바득 덤비면 어쩔 수 없잖아요? 하나님의 바른생활의 일침을 가할 수밖에요. 여러분, 이왕이면 좋게 넘어가세요. 이왕이면 격려해 주세요. 하나님의 나라의 훼방과,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웃어 주세요.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입게 거품 물어서 잘 된 사람 없습니다.

 

3. 성도의 도리는 예배에 힘쓰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에 대하여 많이 고민합니다. 마치 권투선수한 한 회전을 숨 가쁘게 싸우고 코너로 돌아가 1분간을 쉬며 감독과 코치의 지시를 받습니다. 그 짦은 1분의 시간에 다시 정신력이 무장되고, 체력이 회복되고, 목마름을 해소합니다. 짧은 순간의 쉼이 다음 회전에 큰 영향력을 제공합니다. 한 주간 삶의 현장에서 우리 성도들이 끊임없이 사탄의 세력과 사투(死鬪)를 벌이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교회는 한 주간 동안 삶에 찌들고 영적인 전투에 시달린 우리 구세군인들이 다시 주님을 만남으로 영적 회복, 상처의 치유, 그리고 큰 용기를 부여 받아 신앙을 재충전할 수 있는 영적 충전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충전이나 회복에 실패하면 그 군우는 한 주간의 삶이 얼마나 힘들까를 고민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예배를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제가 주일날 가만히 보면 우리 교회는 주일 성결회로 모든 일정을 마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후예배가 되면 여전히 대화가 길어져 예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차를 마시느라고 예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취미를 즐기려고 예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신 목적은 예배입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 영적 충전을 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오늘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가 이방사람이나 거짓 교사와 같이 모이는 일을 즐겨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예배는 주유소입니다. 여러분 연료가 떨어졌습니다. 엔진 오일을 갈아야 하는데 갈지 않았습니다. 자동차는 멈춰 서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은 작심삼일(作心三日)입니다. 즉, 마음먹은 것이 삼일을 못갑니다. 그래서 주일예배 후 삼일 예배, 즉 수요구령회가 생겼구요, 금요 기도회가 생긴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인들의 연료는 삼일이 지나면 다시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기름을 한 번 넣고 일주일 동안 무한 질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큰 고장이 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신앙의 경고를 합니다. 주의 성도라면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주의 성도라면 성도답게 그 도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면 그것은 더 이상 성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악한 양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고통으로 사는 자기 위안으로 사는 이기적인 사람에 불과 합니다. 성도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 '성결'로 선포해 주셨습니다.

 

무엇이 거룩한 겁니까? 무엇이 성결입니까?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결치 못한 것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온전한 믿음의 도리를 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의 도리를 해야 합니다. 예배에 성도로서 도리를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주의 말씀이 넘치고, 은혜가 넘치고, 예배의 감격이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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