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어린아이 때에는(5.3)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5-04 12:14 조회수 3771


설교제목 : “어린아이 때에는”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3장 9~13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5. 03



고전 13:9-13

어린아이 때에는...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날은 1919년 3·1운동 이후 어린아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922년 소파 방정환 선생 등의 주도로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정했습니다. 그러다가 1927년 5월 첫 주일로 어린이날이 변경되었습니다. 1939년에는 조선 총독부에 의해 어린이날이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해방 후 1946년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부활시켰습니다.

 

원래 '어린이'라는 말은 한국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어린아이' '어린애'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1921년에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도 어른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이다.'라는 의미를 담아 '어린아이'의 높임말로 사용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달은 서로 더 가까워지고, 가족끼리 더 깊은 사랑을 나누고, 더 심도 있는 의사소통을 하기 위하여 정했습니다. 그런 깊은 의도를 가지고 제정된 가정의 달은 선물을 주고받는 달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린이 날 자녀들과 함께 잘 놀아주면 됩니다. 선물 사 주고, 용돈 주면 끝! 어버이날은 부모님 가슴에 꽃 달아드리고 용돈 드리고 식사 한 끼 대접하면 끝! 더 이상 그 무엇도 없습니다.

 

가정의 날은 이렇게 보내라고 가정의 날이 아닙니다. 가정을 좀 돌아보라고, 의미 있게 소통 좀 해 보라고 제정해 놓은 시즌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의 풍토는 꼭 기념일에 말다툼하고, 기념일에 마음 상하고, 기념일에 갈등을 많이 겪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마음을 담아 선물 하나 해 주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까? 그런데 째려보면서 "겨우?"하고 물음표를 찍습니다.

 

용돈 주면 감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이걸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느냐'고 불평합니다. 선물 주고 싶은 마음, 용돈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허전한데 가슴에 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녀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선물사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요즘은 소통의 시대입니다. 말해서 풀어야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특히 어린이날, 우리 자신을 신앙적으로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로 인해 우리가정이 얼마나 아픈지, 지금 나로 인해 우리 자녀들이 얼마나 흔들리며 괴로워하고 있는지 돌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의 사랑의 표현 방법은 좀 독특합니다. 바울의 사랑 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좀 다릅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내가 기뻐야 너도 기쁜 것', '당신이 나를 사랑해줘야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일단 사랑하고 보자는 겁니다. 일단 나보다 당신이 더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바울은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법이 어린아이 때와 어른이 되어서가 다르다는 겁니다. 지금 나의 사랑을 표현 하는 방법이 서툴다면 배워야 합니다. 말로 하는 것이든, 행동으로 하는 것이든 좀 배워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완전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 사랑을 말하고, 표현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 위대한 사랑의 헌장을 마무리하는 순간에 어린아이의 모습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다, 뭔가를 깨닫는 것이 참 이기적입니다. 자기가 좋은 말, 자기가 유리하고 편안한 것을 생각하고, 깨달은때만 좋은 겁니다. 자기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말도 거칠어 집니다. 자기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생각하는 것도 정말 좁아집니다. 이것을 어린아이로 바울은 표현합니다.

 

오늘 11절에 "어린아이와 같고"라는 말이 등장을 합니다. 물론 '어린아이'는 아기, 간난 아이, 유아를 듯합니다. 그런데 상징적으로 단순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내 나이는 분명히 어른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내 말이나, 생각이나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라는 생각도 한 번 해 보아야 합니다.

 

1. 말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 때문에 속상한 적 많으셨죠? 말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좋게도 하고, 좋지 않게도 합니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대충 그 사람의 성품까지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의 수준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준 있는 말을 사용하십니까? 아니면 수준 있는 말을 사용하십니까?

 

조금 더 깊이 생각 해 보세요. 나는 교양 있는 말을 합니까? 아니면 격이 낮은 말을 많이 합니까? 과거에는 사람들이 배운 만큼 언어를 사용 하는지, 자신의 백그라운드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언어들을 많이 선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써서는 안 될 말, 단어를 많이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한 질적인 것들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내가 유리한 말을 먼저 하는 것이 고급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청소년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래야 폼 나는 거 같고, 그래야 힘이 좀 세져 보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말은 상대방을 높여주는 사람이 말을 잘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좋아하고, 편안해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좋은 언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순전히 욕입니다. 순전히 자기 과시입니다. 순전히 자기의 스트레스 발산입니다. 이건 말이 아닙니다. 욕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욕을 많이 하는 겁니다.

 

'말하는 것'에는 이런 뜻들이 숨어 있습니다. '말하다', '발산하다', '전파하다', '발표하다', '이야기하다'. 그러니까 말은 하는 것은 자기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서 해소하는 것, 즉 발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도하고자 하는 것을 조리 있게 설명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주장하는 공적인 것을 퍼뜨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충분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훈련이 되지 않으면 학문적인 말을 쓰다가 갑자기 욕을 하면 그건 문제가 많지 않습니까? 이제 말하는 것에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즘엔 더 심한 것이 말보다 글도 무섭다는 겁니다. 요즘은 메신저나, 메일, SNS에서 주고받는 말들을 보세요. 청소년들은 얼마나 심각하게 욕을 하고, 어떤 사람은 참 가슴 아프게 글을 실어 놓은 것도 보았습니다. 적어도 내가 사용하는 말이나, 글을 보고 사람들이 조금 편안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아니면 조금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은 아내나 남편을 살립니다. 말은 자녀를 살립니다. 말은 부모를 살립니다. 말이 교회와 사회를 살립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말, 저와 여러분도 좋아하는 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깨닫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11절에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그랬습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감정이나 의견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흥미를 가지는 것', '애정이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뭔가를 발견하고 깨닫는 것에 대한 쾌감을 여러분은 느껴보셨습니까? 그 희열과 짜릿함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여러분은 이해가 되시죠? 뭔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으시죠? 왜냐하면 우리 사이엔 이런 이해력이나 추리력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설교를 주일학교에 가서 하면 아이들 전무다 좁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청소년들이 뭔가를 사고하고, 깨닫는 최소한의 나이를 16살로 봅니다. 이때를 사춘기(思春期)라고 합니다. 즉, 생각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청소년들이 사고를 합니까? 이때가 가장 두뇌회전이 잘 되는 때입니다. 자아 발견이 가장 잘 되는 때입니다. 이때에 이해력을 집중시켜 높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적 성숙도도 빨라집니다. 그래서 이 때 목회자로 헌신하는 청소년들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아무런 생각 없이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생활하도록 하면 인생 적응이나, 삶의 적응력이 떨어지는 겁니다. 책을 많이 읽게 해야 합니다. 조금 사색적인 토론도 많이 하게 해야 합니다. 목적이 있는 자기 주관도 정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장년에도 깨닫거나, 발견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사는 분들을 봅니다. 신앙적 흥미가 필요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애정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교회를 향한 관심이 필요 합니다.

 

3.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11절에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계산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추리하다', '짐작하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생각을 하는 것이 진짜 어린아이와 같이 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 범위를 넓혀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좀 더 고민해서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이 말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못하는 생각은 잡생각입니다. 추리나, 공상(空想)도 글이 되고 말이되고, 영화가 됩니다. 작품으로 표출이 됩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 생각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생각을 해서 말로, 글로 표현했는데 그것이 했다하면 핵폭탄입니다. 이건 심각하죠.

 

그래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도록 수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을 해도 좀 그리스도인 다운 생각이 필요 합니다. 말을 해도 그리스도인 다운 말이 필요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9절에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해하는 겁니다. 완전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분적이더라도 기독교인으로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성숙은 10절의 말씀처럼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마음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12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신앙고백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말을 해도 '믿음, 소망, 사랑' 생각을 해도 '믿음, 소망, 사랑' 뭔가를 깨닫고 감사를 해도 '믿음, 소망,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이 중에 어느 것도 버려선 안 됩니다. 이 셋이 모두 있어야 사랑이 빛나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어린이 주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말과 생각과 깨달음이 가정과 교회에 힘이 되길 원합니다. 위로가 되길 원합니다. 웃음과 행복을 제공하는 성숙된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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