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생명,그리고...(4.26)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4-28 00:16 조회수 3815


설교제목 : “예수,생명,그리고...”
성경본문 : 유다서 1장 17~25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4. 26



유1:17-25

예수, 생명, 그리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예배합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 믿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하루의 일상을 보냅니다. 한 번 예를 들어 볼까요? 먼저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엽니다. 정말 상쾌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맑은 공기, 향기로운 꽃냄새가 납니다. 이럴 때 커피 한 잔을 마십니다. 온 입에 커피 향내가 나를 감동시킵니다.

 

그러다보면 문득 어제 아쉽게 끝난 아침 드라마 줄거리가 생각이 납니다. 커피를 한 모금 하면서 T.V.를 켭니다. 드라마 내용에 빠져 울고 웃습니다. 그 때 마침 동창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오늘 자기와 같이 쇼핑하고 점심이나 함께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옷, 저 옷을 골라 입고 집을 나섭니다. 마침 동창이 백화점 앞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서로 좋은 상품을 권하며 어울리겠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품을 하나 구입을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나에게 꼭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어울린다고 하도 추켜올려서 그냥 지른 겁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블로그에 나타나 있는 맛집을 찾아 이동합니다. 그곳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친구들 뒷담화, 자녀들 이야기, 남편 이야기 등등 이제 거의 하루가 다 갑니다. 내일 또 만날 것을 약속하고 남편과, 자녀들이 귀가할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귀가한 남편과 자녀의 식사를 준비 합니다. 그리고 친구가 권해준 물품을 한 번 감상합니다. 그러나가 저녁 드라마를 봅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위하여 정성껏 화장을 합니다. 내일은 또 누굴 만나 어떻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까하는 스케줄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보내는 하루의 계획표입니다. 예수가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아침에 일어나 주님을 대면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지난해 그대로 펼쳐져 있는 말씀 묵상 카드라도 한 번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적어도 교회에서 오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체크 해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가 있는 사람, 예수가 없는 사람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하루를 사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기독교인입니까? 어떤 면에서 나는 기독교인입니까?

 

예수의 동생으로서 유다의 고백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뭔가를 꼬집어 강조하는 말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형태가 무엇이었든지, 이단적 사상이 되었든지, 불신앙적 행동이 되었든지 우리의 신앙을 불같이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위하여 드리라는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정말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따르면 구약에서부터 우리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구약의 메시지를 논리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가 없어도 하루를 생활하시는데 불편함이 없으십니까? 마음의 고뇌나 갈등도 없습니까? 신앙적 판단이나 생각도 없이 삶의 시간들을 소비하십니까? 적어도 내가 예수의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하루를 시작하고, 보내고 있습니까?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내가 분명히 예수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인생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1. 교회 안에 있어도 예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목회자들이 설교하고 외친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물론 수십 년 동안 목회자로부터 들은 말씀이 한 두 마디만 되겠습니까? 그분들의 설교를 모아보면 아마도 성경책 몇 권의 분량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왜 이렇게 공허합니까?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기억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신앙의 핵심이 없이 살아서 그렇습니다.

 

17-18절의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말한 한마디는 우리의 삶에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늘 분열을 일으키는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묵상을 해 보세요. 지금 나의 삶의 모습에 육체적인 모습으로 살아온 환경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금지된 것'을 갈망하고, 동경하고 살아오진 않았습니까?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한 것, 의미 없다고 설교를 들은 것보다 내 중심이 요구하는 대로 이끌려 살아오진 않았습니까? 나와 함께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으며 즐거움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기독교인도 별수 없네'하는 눈총은 받고 있진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교회 밖에서 미쳐 다 쏟아 붇지 못한 자신의 욕구를 이사람, 저 사람에게 쏟아 부어 괴롭히고 있진 않습니까? 그 이유를 19절이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고 말입니다. 공동 번역에는 "이런 자들은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본능적인 욕정을 좇아서 살면서 분열을 일으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예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있어 봤자 분열만 조장합니다. 이런 공동체는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인정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 받을 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성령에 속한 사람들은 반드시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싸우지 않으려면 끼리끼리 놀 수밖에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끼리, 성령에 속한 사람들 끼리 말이죠. 그러나 이 둘이 충돌하면 결국 교회는 깨지고 마는 겁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목회자의 설교를 기억하고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주의 말씀의 기준에 맡길 수 있는 신앙인들이 많기를 소원 합니다.

 

2. 교회 밖에 있어도 예수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뭘 해도 예수의 냄새가 나는 사람들입니다. 뭘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20-21절의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자신을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분열과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믿음에 자신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자신이 더욱 성숙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내 안에 갈등과 분열과 욕망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는 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믿음으로, 신앙으로 하루를 살았는지 아니면 신앙이 없이도 당당하고, 불편함이 없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 안에 예수가 없어도 잘 살았습니까?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동안 예수가 없어도 잘 사셨습니까?

 

지극히 거룩한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이름으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가 있는 신앙인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거룩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식을 믿거나, 아내나 남편을 믿는 믿음이 아닌, 거룩한 믿음, 즉 예수 그리스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거룩한 믿음이 나를 살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믿음이 오늘 나를 존재하게 합니다.

 

나를 지키는 무기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키고, 나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우심과, 해결하심과, 인도하심이 함께 할 수 있는 겁니다. 나를 지키는 무기가 내 입의 막말이 되고, 힘이 되고, 물질이 되고, 권세가 되면 곤란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씨앗이 지금 여러분의 심령에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삶에서 심겨지고, 자라나고 있어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생명을 심습니까? 긍휼을 무한 리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긍휼은 어떤 생각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긍휼은 동정심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긍휼함이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기독교인이 뭐 저래?'하고 외면당합니다. 이 긍휼함이 사람들을 불구덩이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불구덩이에서요? 지옥불에서요. 즉, 전도의 삶이 긍휼의 삶입니다. 사랑의 삶입니다. 은혜의 삶입니다.

 

문제는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야 하는 마음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뭐 빠지고 싶어서 빠집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 이단에 빠지는 사람은 영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 이성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빠집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자신밖에 모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늘 인정만 받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모른 것이 다 있네요. 나보다 잘 난 사람들이 있네요. 그래서 동일성을 인정 받기 위해서 이단으로 넘어 갑니다.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깊은 고백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어떤 환란이나 시련이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내 앞에 능력자로 계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도 나는 예수 없이, 예수의 생명을 키울 힘도 없이, 전도할 힘도 상실하고 맙니다.

 

나에겐 예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나를 살리는 원천이 예수 생명입니다. 그리고 나를 살게 하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는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생명의 법이 나를 지배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날 살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이름이 가득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의 생명, 예수의 호흡으로 사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 없이도 사는 것이 가능한 교회가 아니라, 예수 사랑 때문에 사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 믿음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예수를 생각하는 신앙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0)
댓글 작성시 등록하신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