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4.19)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4-20 10:08 조회수 4277


설교제목 :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
성경본문 : 골로새서 3장 1~10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4. 19



골3:1-10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

 

 

우리는 사람들을 육신적인 사람과 정신적인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육신적인 사람' 자신을 가꾸기 좋아하는 사람,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하여 꾸미는 사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있는 척하는 것 등을 보면 육신적인 사람이 틀림이 없습니다. 반면에 정신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뭐든지 객관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 꾸준히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 등을 정신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게 말하면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신앙적인 사람은 소위 정신적인 사람들보다 더 성숙하고, 정신력이 더 강합니다. 여러분은 육체적인 것이 강합니까? 아니면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에 더 강합니까? 어떤 사람은 화장품을 써도 이유 조건이 없이 비싸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이 바른 화장품이 좋은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명품을 소유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좋은 차를 타야 평안해 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거나, 말씀의 묵상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생각나고, 말씀이 생각나고, 뭐든지 자신이 가진 믿음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것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지나치면 광신(狂信)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신앙인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겠습까?

 

신앙적인 사람이라도 또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말로 자신의 신앙적인 모습을 다했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죽도록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신앙적인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그 이유는 오늘 성경말씀 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을 때 나도 살려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이라도 하나님 우편에 두어야 합니다. 골3:1의 이 부분을 영어 성경에서는 "네 마음을 위엣 것에 세팅 시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비록 이 세상에 맞춰져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의 마음은 하늘나라에 고정시켜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마저 이 땅에 세팅을 해 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우리의 영적 다이얼을 하늘로 돌려 보아도 이 땅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원위치 되어 버리고 맙니다.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은지 말이죠. 그래서 2절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하늘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 땅의 것에 집중되어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유치 뽕짝인지 모릅니다. 제발 신앙적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발 고차원적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좀 고상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곧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1. 신앙적인 사람들은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땅의 환경에 세팅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환경, 신앙적인 환경에 세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기가 막힌 말씀이 3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욕망과 죄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님이 당신의 것으로 감춰 놓으셨습니다. 소위 하나님이 찾아 주시지 않으면 난 살 수가 없습니다. 난 시한부 생명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하나님이 감춰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려면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살려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호흡으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호흡을 끊으시면 저와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됩니다. 죽은 사람에게 아무리 비싼 수의(壽衣)를 입혀 보세요. 그것이 죽어서 무슨 자랑거리가 됩니까? 사람 죽어서 염하고 입관하는데 노잣돈 아무리 많이 넣어 보세요. 그것이 정말 노잣돈이 되나, 장례 지도사 수입만 올리는 것이 되는거죠.

 

지금 내가 살아 있지만 얼굴이 맑지 못하면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꾀죄죄해 집니다.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 보입니다. 그건 지금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잘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가 탄탄해야 합니다.

 

4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줄 수 있는 호흡기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생존 할 수 없도록 그렇게 세팅해 놓으셨습니다. 예수가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 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엣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2. 비신앙적인 것들을 죽여야 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이 땅의 것만 생각하고,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사람이 비신앙인 처럼 하고 사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없습니다. 신앙인이 비신앙인의 모습을 하고 사는 것을 이렇게 비유 해 보겠습니다. '살긴 살았는데 살아있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뭐라고 하죠? 예, 식물인간이라고 합니다.

 

식물인간은 숨은 쉽니다. 그런데 신체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의식은 있으나 그 의식이 활동으로 연결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사는 방법은 빨리 의식이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신체 활동이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5절에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기 위하여 하늘의 자양분에 의존해야 할 우리 신앙적 지체들이 이 땅의 것에 뿌리를 내리고, 이 땅에서 뭔가를 얻으려고 슬쩍 가지를 뻗으려고 합니다.

 

땅에 접해서 뿌리를 내리려는 신앙적인 가지들은 빨리 잘라 버려야 합니다. 더 무서운 말씀은 "죽이라"는 겁니다. 땅의 자양분을 필요로 하는 것들은 죽여야 합니다.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도 말고, 경험하지도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에서 살아서 나를 통제하고, 나를 조종하고, 나를 신앙적 의도가 아닌 세상적인 의도로 이끌면 안 됩니다.

 

내 신앙이 음란이나 부정한 것이나, 사욕이나 탐심이 일어날 때 통제할 수 없다면 난 신앙인이 아닌 겁니다. 언제든지 그것들을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위엣 것을 향하여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이것들로부터 하나님으로 진노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마음에 없는 사람들에게 옵니다. 그러니까 늘 깔딱 고개를 넘는 심정으로 사는 겁니다. 요즘 한 참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는 정치 경제적 뉴스들이 이런 것들로부터 비롯되지 않습니까?

 

비신앙적인 것들을 죽여야 합니다. 음란한 마음을 죽여야 합니다. 부정한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사사로운 욕심이 생겨나는 것도 죽여야 합니다, 탐욕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바울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강탈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너무 탐이 나서 빼앗고, 사기치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의 자양분을 원하는 신앙인들이 있습니까? 내려놓음도 아닙니다. 포기도 아닙니다.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하게 하는 생명 유지의 비법입니다.

 

3. 비신앙적인 것들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비 신앙적인 것들을 죽이지 못하고 예수를 모셨습니까? 그럼 예수의 옷을 입기 이전에 이 모든 비 신앙적인 옷들은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죽여야 할 것이 있고, 벗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음란이나 부정, 사욕, 정욕, 탐심은 생명이 있어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생명은 없지만 나를 두르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악세사리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빼버리고, 벗어 버리면 되는 것들입니다. 잠간을 참지 못해서 파르르하는 것 벗어 버려야 합니다. 어떤 악한 의도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벗어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구지 필요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있어야 자기 위신이 서고, 자기를 깔보지 못하게 날을 세우는 겁니다.

 

소위 복어를 건드리면 몸을 부풀리는 허세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을 해 보세요. 여러분, 그런 사람 결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똥이 더러워 피하지 무서워 피하는 것 아닙니다. 이렇게 비신앙적인 것들을 뒤집어쓰고 다녀 보세요. 어느 누구도 그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왜냐구요? 같이 있으면 다치는데요? 같이 있으면 나도 똑같이 더러워지는데요? 왜 내가 다가가면 사람들이 피하는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진짜인 것처럼 위장하고, 분장하고 씩 웃으면서 다가와도 그것이 거짓인 것이 뻔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피하지 않고 같이 있을 수 있습니까? 품속에는 분함과 노여움과 악한 의도나 비방을 감추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 옷 속에서 이런 것들을 노출시킬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까 쿨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옷으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사람들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울게 하지 말고 이제는 그 행실을 고쳐먹어야 합니다.

 

이제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어떤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야 합니다. 더 의미 있는 말씀은 지식에 까지 새롭게 입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양으로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도, 그 마음도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지식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좀 죽이며 삽시다. 더 크면 못 죽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게 당합니다. 위엣 것에 마음을 두고 사세요. 이 땅에 마음을 두고 살면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끊으시면 그 삶이나 목숨도 끊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좀 갈아입고 살기를 원합니다. 신앙적인 옷을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설치면 그나마 있는 사람도 다 도망갑니다. 있을 때 잘하세요. 곁에서 웃어 줄 때 잘 하세요.

 

우리 교회가 주의 은혜를 말하고 찬양하고 사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이고, 하나님의 계획으로 만나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정말 신앙적인 사람들이 모였다는 교회로 인정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 도

 

 

 

 

 

 

 

 

 

 

 

 

 

 

 

 

 

 

 

 

 

 

 

 

 


 (0)
댓글 작성시 등록하신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