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4.12)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4-13 22:46 조회수 3832


설교제목 : “주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
성경본문 : 요일 5장 10~12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4. 12



요일5:10-12

주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이 맞습니까? 정말요? 정말 예수를 믿습니까? 그걸 뭘로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예수 믿는다는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어떤 증거나, 증명서가 있습니까? 저한테 한 번 보여 주세요. 어떤 분은 '제가 이렇게 교회에 와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안 믿어도 교회는 얼마든지 출석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예수 믿는다는 증거입니까? 아니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저요, 목걸이 귀걸이를 십자가로 달고 다닙니다.'라는 분도 있습니다. 아니오. 얼마든지 십자가를 액세서리로 달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를 고백하는 표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차에 십자가를 붙이고, 성경책을 넣고 다니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의 표시라고 어쩌면 인정할 수도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 모이는 사람들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교제를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그 마음엔 하나님 없이 예배하고 교회에 출석을 합니다. 막상 교회 밖에 나서면 누가 기독교인이고, 누가 세상 사람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습니다. 휴게소나 공공장소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현재 통계로 따지면 한국 사람들 중에 열에 두 세 사람은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식사할 때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관님, 요즘 누가 눈감고 오랫동안 식사기도를 합니까? 젓가락을 집는 동시에 '하나님 땡큐'하면서 기도하지요."라고 제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젓가락을 좀 늦게 드는 사람들의 눈치를 제가 봅니다. 혹시 젓가락을 들면서 잠시 눈을 감는 건 아닌지 제가 유심히 쳐다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을 합니까? 소위 주의 복음의 사람들이 가진 증거를 좀 보여 주세요. 요즘엔 성경도 잘 들고 다니지 않으니까 길거리에서 기독교인들을 구별하기가 참 어렵더라구요. 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주의 복음을 따라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표시도 없고, 증거의 삶도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분명한 증거, 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증거가 꼭 있어야 한다고 강조 합니다. 내면적인 증거가 있어야 그 증거가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속에 품은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드러날 수가 있겠습니까?

 

쉬운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요즘엔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습니다. 그럼 그 영상이 저장 장치인 디스켓에 입력이 됩니다. 그 저장 장치를 컴퓨터와 연결을 하면 동영상도 볼 수 있고, 사진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디스켓에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으면 화면을 볼 수 있습니까? 아니오. 아무것도 없는데 뭘 볼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은 제게 묻습니다. '사관님, 지워졌을 수도 있잖아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워졌으면 없는 겁니다. 물론 복원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에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 내용물이 겉으로 표시가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과거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식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 믿음도 복원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한 때 뜨거웠던 여러분의 신앙도 복원이 가능합니다. 이랬든 저랬든 내 속에 분명한 믿음의 증거가 없으면 절대 겉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1. 주의 복음을 믿는 자는 그 마음에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 증거는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 속에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복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복음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믿음이 확실하게 있어야 합니다. '증거'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투스(마르투리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증거자', '증언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죽은 순교자를 의미하는 말로 '마르투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마르투스는 '순교자'로 번역이 됩니다.

 

오늘 성경은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는 말을 '마르투리아'를 사용합니다. 이제 기독교인의 단어로 마르투스가 쓰이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죽음으로 그 표현을 합니다. 죽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할 수가 없는 역사적 상황에서 '마르투리아'를 사용합니다. 죽음의 상황이 아니면 예수를 표현할 수가 없어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죽음을 선택합니다.

 

히11장 36-37절에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들의 믿음의 상태를 35절이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복음의 사람들은 구차하게 변명이나 해서 풀려나고, 목숨을 구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은혜로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는 신앙인들은 더욱 더 심한 고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진 마음속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쏟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흘러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믿음의 고백을 복음으로 세상에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허투루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믿음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복음이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예수를 쏟아 내는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2. 주의 복음을 믿는 자는 그 마음에 생명이 있습니다. 11절의 말씀을 보세요.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 안에는 지금 이 육신을 살리는 생명 외에 또 다른 생명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본문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예수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에게 예수 없는 생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떤 깨어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 육신의 껍데기를 아주 혐오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부정하고, 영혼을 소중하게 다룹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육신이 감싸고 있는 영혼 외에 또 하나의 영혼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어 고백을 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쏟아 낼 수 없을 정도라면 그 사람은 예수가 그 안에 없는 것입니다. 육신이 감싸고 있는 그 영혼이 세상의 사치나, 쾌락이나, 탐욕에 물들어 살고 있다면 그 육신을 비롯해서 그 영혼이 무슨 참된 가치를 가지고 이 세상을 이어 가겠습니까? 생명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은 자랄 때마다 허물을 벗습니다. 허물을 갈아입는 것, 육신의 껍데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영혼도 성숙하게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이 병들어 성장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예수의 이름을 육신의 껍데기에만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과 영혼도 망칠뿐 아니라, 이 세상에 예수의 이름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손가락질 하게 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의 생명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생명이 있음은 살아 있음을 의미 합니다.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예수의 생명을 품고 계십니까? 어떤 예수의 싹이 나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복음의 사람들의 마음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을 품고,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해야 합니다. 혹시 사탄이 그 씨앗을 바꿔치기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생명, 예수 부활, 예수 복음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세상에 나타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3. 주의 복음을 믿는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의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입니까?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그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이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들어 쉬는 숨과, 내쉬는 숨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들숨, 날숨에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에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생명이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이 증거가 없으면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 복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되어가야 합니다. 복음이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은혜의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겸손과 섬김의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 되어감의 의미가 사라지면 결국 신앙인이나 교회가 썩고,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모신 사람이 생명의 사람입니다. 예수를 모신 사람을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내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복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이 없이도 잘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곧 생명이고, 이 생명이 복음의 사람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데 말이죠. 여러분 안에 어떤 믿음의 증거가 있습니까? 확신이 있습니까? 의심이 있습니까? 뭔가 있긴 있는데 그것이 믿음인지, 뭔지 잘 모르겠습니까? 이제 다시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으시기 바랍니다. 멋진 기독교인으로, 그럴듯한 기독교인으로, 맵시 있고 당당한 신앙인으로 다시 모습을 가다듬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멋있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소개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복음의 사람들이 많이 알려 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세상과 맞짱 떠도 밀리지 않는 튼튼하고 순수한 신앙인이 넘쳐나시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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