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과 함께(3.29)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3-29 23:31 조회수 4317


설교제목 : “주님과 함께”
성경본문 : 마태복음 27장 1~10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3. 29



마27:1-10

주님과 함께(종려주일)

 

 

주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주일로, 부활절 전 주일이며, 수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면서 "호산나 다원의 자손이여"하고 환호성을 울리던 사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요 12 : 13, 계 7 : 9).

 

그래서 4세기 이날 경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는 특별한 의식을 해왔습니다.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악마를 대적하는 상징물로써 축복의 나무가 되고 있으며, 중세에 와서는 이 행진이 한 교회에까지 가는 풍습이 되었는데, 종려나무를 축복하고 분배해 주면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또한 이 행진 때는 종종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복음서나 십자가, 또는 나무로 만든 나귀 위에 그리스도가 올라앉은 모습을 만들어 행진에 앞세웠습니다. 중세 초엽에는 종려나무가 예배에까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도 중세에는 마태복음 21:1-9을 읽은 후에 목사와 신도들이 십자가를 맨 앞에 세우고 영광의 찬송을 부르며 행진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 행진에서 다른 성당으로 가거나 자기들의 성당으로 되돌아 왔을 때 마태복음의 수난 기사가 든 찬트(Chant)를 부르며 예배를 드립니다. 행진 때 사용되는 고유한 빛깔은 빨간 색이며 예배 때도 빨간 색을 씁니다. 오늘의 카톨릭에서는 이 행진을 별로 하지 않으며, 다만 사순절 기간 중 수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로 기념하며 종려주일의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12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나를 팔아넘길 사람이 있으리라' 12제자들은 한결같이 그가 누구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룟유다는 아무런 말도 없이 예수님과 함께 다정하게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복음을 나눠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니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 이 땅에서 자신들이 보고들은 바 예수에 대한 소식들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먹고 자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은 잘 알지 못하지만 머리를 갸우뚱거리면서 예수를 좇기도 했습니다. 들어 놓고 배워놓으면 그 믿음의 지식은 성령님께서 알게 하심으로 폭발적인 은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십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그 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예수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차마 겪을 수 없는 고통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이지만 그 뜻을 넘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한편, 가룟 유다을 보세요. 그는 이미 예수를 반역죄로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고의 대상으로 은 30의 돈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당시 노예한 사람의 시세인데 약 9달러 50센트(11,400원 정도)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중요한 순간에 함께 있어만 주면 되는 겁니다.

 

1. 그럼 가룟 유다는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를 판 제자(마27:5)입니다. 또 그 이름은 제자 중에 언제나 맨 끝에 적혀 있습니다(마10:4,막3:19,눅6:16). 그리고 예수님을 비롯하여 12사람들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자금을 관리하는 회계를 맡아보았습니다(요12:6,13:29).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을 책망했습니다(요12:4)5). 예수께서 부드럽게 충고합니다만 그는 오히려 분격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팔아넘길 것을 제의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에 동의하여 은 30개를 지불했습니다. 마10:1, 눅9:1에 보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일도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룟 시몬의 아들이며 (요6:7) 주께서 택한 열두 사도 중에 한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가장 불가사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의 뜻과 배경, 성품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와 죽은 방법 등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가룟이라는 이름에는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즉 "그리욧 사람" "암살자" "가짜, 거짓말쟁이, 위선자"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일반적인 설명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롯 사람"이란 견해로12사도 중에 11사도가 갈릴리지방 사람인데 반해 유일하게 가룟 유다만이 유다 지방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둘째는 가장 가능성 있는 견해로는 가룟이라는 말이 "가짜, 거짓말쟁이, 위선자"를 뜻하는 "세케르"라는 아람어의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이 말이 당시 아람어를 사용하던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배반자를 부를 때 사용한 별명이었다는 견해였습니다.

 

여하튼 그의 성격을 생각하여 볼 때 아마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될 때 지상에 있어서 어떤 이들일 얻게 되리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제자들의 회계 일을 보면서 일행의 전대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부정을 행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 집에서 그녀가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표시로서 지극히 비싸고 순수한 나드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제자들 특히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서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그 돈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넘긴 계획되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에 계획되어지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의 선하심에 계획되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가진 것은 없지만,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드릴 것은 없습니다. 누구처럼 척척 많은 돈을 주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옷도 벗어줄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주님께 드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로 계획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이익이 눈앞에 오면 사랑이 떠나 버립니다. 그래서 사랑은 움직이는 건가요? 가룟 유다에게는 또 다른 사랑이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세상 적인 사랑입니다. 고차원 적인 사랑을 볼 수 없었던 근시안이었습니다. 예수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3에 “예수를 판 가룟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후회를 합니다. 돈을 돌려주려고 하지만 그 돈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인을 판돈이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주인을 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판돈입니다.

 

세례 요한이 왔을 때 400년 만에 다시 나타난 예언자라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예언자가 말하길 내 뒤에 오시는 예수는 내가 신발 끈도 감히 묶어 줄 수 없는 분으로 말했습니다. 그랬으니 그 예수님의 유명성과 위대함은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졌습니다.

 

그래서 마 16장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보세요. 어떤 사람은 죽었던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선조들이 따랐던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 아니면 또 다른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소문이 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인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꼭 그 명분이 아니더라도, 위대한 인물로 쳐도 예루살렘에서는 400년 만에 나온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런 위대한 사람들 판 겁니다. 그러니 누가 그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의 저주, 하나님의 저주가 그 돈에 담겼는데 말이죠. 결국 유다는 그 돈을 성소에 던졌습니다. 바르게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고 통곡하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받는 비결은 베드로가 부인 했지만, 배반했지만 그분이 생전에 전했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대 교회에 엄청난 전도자로 부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 보세요. 은을 성소에 던져 넣었다고 했습니다. 정말 순간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주님 앞에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 양심의 고통을 끌어안고 방황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와 함께 하지 못하면 결국 방황합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고 맙니다.

 

오늘을 종려주일입니다. 아물러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어쩌면 이 고난의 주간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다신 생겨선 안 된다는 주님의 은혜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 할 수 없는 저주받은 인간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잘못을 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주님 앞에 다시 서는 겁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겁니다. 과거지사야 어찌되었든지 간에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온전함으로 서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동행입니다.

 

내가 유리하거나 불리하던지 간에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양심적인 문제, 윤리나 도덕적인 문제, 신앙적인 문제가 되었든지 간에 주님은 지금 당신 앞에 설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제 오늘 이 종려주일과 고난주일에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시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나를 예수 믿게 하신 증거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십자가, 헌신과 희생의 십자가 그려지지 않았습니까?

 

유다를 보세요. 2천년동안 교회, 나라, 사회, 개인, 인간이 존재하는 어느 곳에서든지 저주의 사람으로 불려 집니다. 나는 축복의 사람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그와 함께 동행한 사람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그곳에 설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주님과 함께하기를 원하는 21세기의 사도들이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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