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은혜를 받은 증거(3.8)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3-12 21:41 조회수 3996


설교제목 : “은혜를 받은 증거”
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4장 7~11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3. 08





벧전 4:7-11

은혜를 받은 증거

 

 

여러분, 은혜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뭐가 은혜를 받은 건가요? 은혜를 받은 사람은 뭐가 다릅니까? 기도해서 목소리가 쉬었으면 은혜 받은 건가요? 찬송하고 기도하면 은혜 받은 건가요? 헌금 많이 하면 은혜 받은 건가요?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를 많이 하면 은혜 받은 건가요? 그렇다면 그 증거를 한 번 보여 주세요.

 

예배도 예배 같지 않게 합니다. 기도도 하다가 맙니다. 헌금은 일 년에 몇 번이나 하는지 모릅니다. 전도요? 이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여러분은 뭘 하셨습니까? 은혜 받았으면 그 증거를 내 놔 보시라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많은 표시를 원합니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 국회의원, 관공서의 사람들은 신분증을 목에 걸거나 뱃지를 달고 다닙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그런 뱃지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은혜를 받았다는 표시가 무엇인지 한 번 묵상해 보겠습니다.

 

1. 열정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예민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예배하는 방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전통적인 방식에 나의 영적 감각이 무뎌져 있습니까? 늘 그렇고 그런 예배로 인하여 안일한 마음이 생겼습니까? 예배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오직 그분만이 영광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오늘 집에서 교회에 오려고 나설 때 어떤 생각과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의 교회들이 한 때 예배의 갱신으로 몸살을 앓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소위 ‘열린 예배’라든가 ‘역동적 예배’, 또는 ‘참여하는 예배’를 만들기 위하여 예배를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를 했습니다. 강대상을 최소화하고, 설교자는 양복이나 가운 대신에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웬만하면 기독교의 상징이나 표식을 부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용어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예배와 문화에 접근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전통적인 예배의 형식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방법이 찬양과 경배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역동성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배의 갱신이 ‘예배자로 하여금 거룩하고,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들은 예배가 세상으로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배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배는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라는 개념이 많이 허물어졌습니다. 엄격하게 따지면 “예배”와 “집회”라는 의미를 분명히 잘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즉, 사람이 신에게 찾아와서 경배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나 ‘집회’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어떤 모임의 목적을 가지고 전하는 형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예배를 지나치게 변형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를 사람들을 위하는 집회로 바꾼 것입니다. 예배는 세상으로 다가가는 방편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신(神)께로 다가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건 몰라도 예배에 대하여 ‘예배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가 중요합니다. 요즘은 예배의 형식이 ‘집회’의 형식에서 다시 “예배”의 모습으로 전환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사람을 향하여 다가섰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신령한 마음, 거룩한 예배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거룩’이라는 표어로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어떤 형식, 방법, 역동성, 거룩함도 다 중요합니다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예배하는 자’로서 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배자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이 신령한 마음, 진정한 생각, 거룩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7절의 말씀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소위 때를 아는 겁니다. 예배자가 아니면 하나님이 이 시대에 하시는 경고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은 술취해서 흐리게 판단하고, 생각나지 않고, 무슨 말을 하는지 두서도 없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배를 통하여 훈련받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언제나 맑고, 신선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은혜 받았습니까? 그러면 예배가 즐거워야 합니다. 예배의 참 맛을 알아야 합니다.

 

2. 섬김의 자세가 있어야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자’라는 의미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종을 의미합니다. 하인입니다. 종놈은 어쨌든 주인이 편안하게 의식주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입니다. 이 의미가 ‘기독교인’의 의미로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종’입니다. ‘종님’이 아니라 ‘종놈’입니다. 가끔 기도할 때 노부교님들이 하시는 말씀, 우리 ‘종님’을 붙들어 주시고...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종에게는 존칭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즉, 종놈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 흥미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기독교인들이 만들어 낸 전문용어가 선생과 목사, 집사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해 보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니 여기가 천국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갑자기 지옥이 될 수 있는 간단한 요건은 섬기는 자가 대접을 받으려고 하면 지옥입니다. 다툼입니다.

 

“왜 내가 당신을 섬겨야 합니까? 왜 당신에게 봉사해야 합니까? 왜 내가 당신에게 갖다 바쳐야해?”하면 지옥이 되는 겁니다. 마귀가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열을 조장하고, 망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작전은 섬기려는 것, 대접하려는 것에서 ‘나도 대접 좀 받아보자’라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겁니다.

 

8-10절의 말씀을 보세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아주 다양한 묵상을 할 수가 있습니다만, 섬김을 받았으면 섬기라는 것입니다. 서로, 각각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혼자만 받겠다는 생각은 기독교적 생각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먼저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3. 복음전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겁니다. 여러분은 지혜롭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까? 미련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까? 여러분은 신앙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까? 세상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까?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구원과 은혜를 고백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데, 사람들이 나더러 세상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하면 참 속이 상할 겁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사는 나를 신앙적으로 봐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사람인데 정말 학교다 닐 때 배운 지식의 활용 이외에는 정말 지혜다운 지혜를 발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교육학과를 나왔는데 자녀교육은 엉망입니다. 식품 가공학과나 가정 관리학과를 전공했는데 가정 살림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금 더 심하게 가 볼까요? 기독교 신학을 전공했는데 신앙생활이 말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자신의 삶의 지식과 환경이 따로 놀 수밖에 없는 경우에 자신이 경험해 온 삶의 지식과 지혜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조금 확장해서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기독교인인데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인의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으로서 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역량은 복음을 전하는데서 나타납니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실 겁니다.

 

11절의 말씀을 보세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사람답게 주님의 귀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은혜 받은 신앙인 맞습니가? 뭘로 증거하십니까? 은혜 받은 사람들이 많으면 교회가 활력이 넘칩니다. 즐겁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귀한 사랑으로 은혜의 증거들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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