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앙생활은 직접적인 것입니다(2.22)
담임사관 작성시간 2015-02-22 21:46 조회수 4925


설교제목 : “신앙생활은 직접적인 것입니다”
성경본문 : 로마서 12장 10~13절
설 교 자 :  담임 사관
설 교 일 :  2015. 02. 22




롬12:10-13

신앙생활은 직접적인 것입니다.

 

 

찬송가 370을 다같이 불러 볼까요?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2.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낮에는 골몰하나 쉴 때도 오겠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3.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지는 해 비낀 볕에 힘써 일하고 그 빛이 다하여서 어둡게 되어도 할 수만 있는 대로 힘써 일하라"

 

여러분 가사를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이런 찬송은 1854년에 루이스 콕힐이 작사를 했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힘을 다하여 주의 일을 해도 모자른다는 뜻입니다. 찬송가 381장은 제목 자체가 "충성하라 죽도록"입니다. 구세군 찬송가 639장 후렴에는 "내일과 내 온시간 내 뜻과 내 재능다 내심령의 열정을 모두 주께 바친다"는 가사도 있습니다.

 

초기 구세군 찬송이나 그 때 당시의 찬송가 가사들은 우리에게 열정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가사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건 우리의 상황이나 입장을 따지고, 계산하고,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신앙인은 시간과 재능과 목숨을 다하여 주를 섬겨야 합니다.

 

이런 복음성가도 있습니다. "초가 삼간도 나는 만족하네 값진 재물도 내겐 없지만 내게 주어진 하늘나라에 가면 내겐 황금과 은만있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있네 영광의 빛이 찬란한 그곳 그날이 오면 다시 방황지 않고 순황금길을 거닐겠네 2. 나 가난해도 외롭지 않네 천국길 가지 실망없다네 나그네로서 면류관쓰고 거문고 타는 천국가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있네 영광의 빛이 찬란한 그곳 그날이 오면 다시 방황지 않고 순황금길을 거닐겠네" 가난해도, 초가삼간에 살아도, 값진 재물이 없어도 오직 주만 위해, 천국의 삶을 바라며 살겠다는 고백적인 찬송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믿고 회개하면 주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는 겁니다. 재산과 몸과 목숨을 주를 위해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지위와 고하, 부와 가난을 막론하고 모두 주를 위해 바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을 드려 교회를 삼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논과 밭을 바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도 모자라 헌신하여 목회자의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처럼 왜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왜 주일 성수를 해야 하는지, 왜 봉사를 해야하는지를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배워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봉사하고, 재물을 드리고, 몸을 드리며, 순교를 바라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초가삼간에 살아도, 당장 끼니걱정을 해도 주를 위한 헌신과 봉사와 예배하며 예물을 드리는 신앙의 삶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은 간접적으로나, 우회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로 미루고, 다음으로 미루고, 내 상황을 따지고,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를 위한 헌신은 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악조건이고, 상황이 말이 아니라고 해도 주를 위하여 저 과감하고, 화끈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복신앙이나 어떤 신비주의적이나 광적인 신앙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고, 계산하고, 상황을 따지고, 여건을 따지는 것은 초등적인 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조금 더 성숙한 신앙인들은 그 삶이 행동으로 직접 나타납니다. 이미 성인이 된 우리는 조금 더 신앙적으로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믿음의 고백과 삶이 필요합니다.

 

1. 직접적인 신앙생활은 선의의 경쟁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분에서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은 당신의 피로 사신 것이기에 마땅히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직접적인 신앙의 다양한 표현들은 우리 삶입니다. 예배입니다.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우리의 삶의 표현이 사라지면 예배도 의미가 없고, 우리의 삶의 목적도 의미가 없습니다.

 

10절의 말씀을 보세요.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직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나 자신보다 더 높게 존경을 표하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마음을 표현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표현, 존경의 표현은 절대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기 전에 내가 먼저 표현을 하라는 겁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말하고 표현하고 실천하라는 겁니다. 이건 무한 경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한 마음을 표현하는 그 자체를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일단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깔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무엇이든지 올려 보는 것은 용납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요. 성경은 분명히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정해 주고, 높여주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왜 내가 자꾸 코너에 몰립니까? 자꾸 아래로 보려고 하다보니까 그렇습니다.

 

공동번역은 본문을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은 서로 다투어 이겨야 합니다. 절대 칭찬하고, 사랑하는 것은 간접적이 되어선 안 됩니다. 직접적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이 똑같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겁니다.

 

2. 직접적인 신앙생활은 열심과 부지런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외적인 것을 의미 합니다. 가장 눈에 먼저 띠는 것이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입니다. 행동이 시원치 않으면 그 사람은 별로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면적으로 보이는 삶의 자세도 중요 합니다.

 

아무리 잘난 체를 해도 그 삶의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을 많이해도 그 언변만큼 신뢰가 가지 않는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의 말씀을 보세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함이나 열심을 품는다는 말은 그만큼 내가 신앙적인 모습을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지런하고, 열심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성령의 뜨거운 감동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소위 은혜를 받고, 은혜를 회복하고, 신앙의 상처가 치료되어야 열심을 품을 수 있는 겁니다. 힘들고, 어렵고, 은혜가 떨어지면 결국 하나님의 일은 할 수 없는 겁니다. 신앙인으로서 믿음이 들었는지, 떨어졌는지는 하는 일들로 나타나는 겁니다. 열정적으로 교회일을 감당하다가 웬일인지 주춤 합니다. 그건 '내가 믿음이 떨어졌다'는 신호입니다.

 

그래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더 부지런을 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진 신앙적인 마음까지 식어집니다. 지금 머뭇거릴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주의 사역을 위하여 급하게 파송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게으름을 피울 때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주의 성령의 불이 타 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신앙의 열심이 얼마나 유지 될 것 같습니까?

 

이제 부지런함을 보여 줘야 합니다. 내가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여러분이 신앙적인 사람인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3. 직접적인 신앙생활은 영적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적인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내연(內燃)이 외연(外燃)입니다. 즉, 안에서 타면 밖으로 연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안에서 타는데 표현이 안 될 리가 없습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너무 어렵습니다. 가난합니다. 여건이 좋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법이 있으면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자녀들 학비는 고사하고, 끼니도 이어가기 어려운데 헌금하라구요? 한 시간, 두 시간 나가 일을 하면 돈이 얼만데 그 시간에 교회에서 봉사하며 일하라구요? 아닙니다. 이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건이나, 가난이나,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환란을 참으며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합니까? 어떻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바로 여기에서 우리 한국 기독교인이 성공한 비결이 있는 겁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은 가난하고, 힘들고, 못살 때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일제시대,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 나라 전체가 어려운 시기일 때 한국 기독교는 기도하고 예배하고 예물 드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해도 주님께 감사예물 드리고, 십일조 드리고, 기도하고, 예배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기독교입니다. 비록 오늘날 지나친 물질주의로 흘러 그것이 타락의 원인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신앙을 이런 영적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안 된다고 원망할 시간에 울며 기도하십시오. 도저히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 이 교회에 나와 주님께 부르짖으세요. 하나님이 들으시고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답입니다. 주님이 답입니다. 신앙은 간접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이 되어야 합니다.

 

4. 직접적인 신앙생활은 형편이 어려운 성도를 도와야 합니다. 13절의 말씀을 보세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가장 기독교인이 돋보이는 순간이 바로 돕는 손길입니다. 어려운 신앙인을 돕는 겁니다. 그리고 확대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겁니다. 이 자체가 기독교인의 직접적 행동이고 표현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사장으로 선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돕는 것이 당연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동정이 아닙니다. 연민도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내 형제를 도와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잊고 삽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물질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물질의 복을 주셨습니다. 아끼면 안 됩니다. 인색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인색하고 아끼면 하나님이 거둬가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질을 주신 의도대로 내가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표현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그것도 아주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이웃을 섬기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행복하고, 감사해 하고, 기뻐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떨어진 성도가 있습니다. 속히 회복하십시오, 주의 은혜로 치료 받으세요. 그래서 이 교회가 마지막 시대에 주님이 주신 귀한 사명 감당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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