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2016.10.16)
이한슬 작성시간 2016-10-17 16:51 조회수 2837


설교제목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성경본문 : 시편 69편 30~36절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6. 10. 16


오늘은 구세군 자선봉사단(The League of Mercy)주일입니다. 구세군 자선봉사단은 병원을 방문하거나 그 외의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봉사하기 위한 기구로서 1892년 12월 16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당시 캐나다 군국의 사령관이었던 허버트 부스에 의해 창립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1969년까지 호의 자선단(GOOD WILL LEAGUE)이라는 명칭으로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1980년에 이르러 자선위문단에서 자선봉사단(The League of Mercy)이라는 현재의 명칭을 가지면서 그 사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구세군 자선 봉사단의 목적이 있습니다. 구세군 자선봉사단은 돌보는 사역에 봉사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 영문의 한 부서입니다. 구세군이 펼치는 전통적인 봉사 중 최상의 사랑을 표현하는 사업입니다.

 

소외감으로 상처받기 쉽고 또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활동을 통해 자발적으로 봉사하기 원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기구입니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말은 구세군의 기본 봉사정신을 가장 잘 반영해 주는 조직으로 자선봉사단은 구세군의 이웃사랑,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해 주는 활동을 펼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자선봉사단의 중요한 목표는 구세군 선교선언문에서도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역사회 내에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 각각의 필요에 따라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물질적인 지원뿐 아니라 정서적인 지지를 제공하여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제공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 구원을 얻게 하며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정기적인 방문을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조직은 이렇습니다. 세계에 세계 자선봉사단 총재가 있습니다. 그 밑에 세계 자선봉사단 서기관이 있구요. 한 나라에 군국 자선봉사단 부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지방에 자선봉사단 담당관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담임사관의 지시에 따라 봉사단이 활동합니다. 담임사관을 도와서 자선봉사단 단장이 있구요, 영문 자선봉사단 하사관 및 단원으로 조직이 되어 있습니다.

활동대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차별 없는 봉사를 제공받아야 하며 질병으로 고통 받는 병원 입원환자들,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지역사회의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매년 10월 셋째주일에 자선봉사단의 목적과 활동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자원 봉사자의 확보를 위하여 자선 봉사단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헌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헌신’이라는 말은 한국말로 된 성경에 신약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드림’, ‘희생’, ‘바침’이라는 말로 대부분되어져 있습니다. 영어로는 offering(드림), 자기의 일생을 바침, 봉헌한 것, 구별된 것이라는 말인 (consecrate), 자발적으로(be willing)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소위 산 제물, 희생적 행동을 말하는 sacrifice가 있습니다. 또한 구별된 것을 의미하거나, 따로 떼놓은 것을 의미하는 separate가 있습니다.

 

결국 헌신이라는 말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쳐 일생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께 헌신한다는 의미는 '주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내 삶을 바쳐 일생을 사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께 헌신은 주님께 내 몸과 마음과 물질과 재능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몸을 드리면 그에 해당하는 모든 것들을 함께 드리는 것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헌신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구별하여 자신과 소유와 재능과 기술을 드리고 있습니까?

 

1. 헌신은 자원함입니다. 30절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래는 어떤 때 합니까? 노래를 억지로 할 수 있습니까? 노래는 내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강요나 압박에 의해 노래 할 수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감사나, 칭찬도 억지로 하지 못합니다.

 

요즘에 아무리 접대용 멘트가 있다고 해도 감사나 칭찬, 노래는 억지로 할 수 없는 겁니다. 오늘 우리를 한 번 돌아보시죠. 감사가 됩니까? 정말 주를 향한 찬양과 은혜의 찬송이 나옵니까? 찬송하고 감사한다는 것은 주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겁니다. 내 마음속에 우러나와 주를 고백하는 겁니다. 그 노래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사역하게 하는 겁니다. 찬양과 감사가 주의 일을 하게 하는 겁니다.

 

주를 위해 봉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입니다. 세 번째가 되면 화가 납니다. 그리고 봉사를 해도 큼지막한 것을 해야 합니다. 맨날 하인 부려먹듯이 하는 것은 봉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생각을 좀 해 봐야 합니다. 언제든지 수입이 생겨 주님을 위해 십일조와 감사, 성물을 드립니다. 아무리 봐도 조금입니다. 그래서 한 번에 하기로 작정하지만, 막상 그 한 번에 하려고 보니 많습니다. 그래서 우선 자기가 아쉬운 마음에 써 버리는 겁니다.

 

소득이 되는대로 드리는 거나, 1-2년 동안 많은 소득도 없어 드리지 못하다가, 어느 날 복권 당첨되듯이 한 번에 드리는 것이 뭐가 다릅니까? 되는대로 드리는 마음, 항상 주를 위하여 드리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더 멋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31절에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드려도,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줘 섬겨도 중심이 주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그 헌신과 드림은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을 드리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주님 앞에 드림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신악성경에 가난한 자의 한 푼은 전 재산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유가 있는 사람이 만원 헌금하는 게 쉽습니까? 노숙자가 만원 헌금하는 게 쉽습니까? 물론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만원이 아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숙자라도 만원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보편적으로 생각한다면 노숙자 만원은 재산입니다. 생명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만원 헌금하는 것이 마음이 쓰이겠습니까 아니면 노숙자가 만원 헌금하는 것이 마음이 쓰이겠습니까? 이건 말할 필요도 없이 노숙자의 일 만원이 더 마음이 쓰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만원이면 며칠을 버틸 수 있는 자신의 생명 유지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쓰면서 물질을 드리는 만큼 주님은 중심으로 찬양하며, 감사하며 즐거워함도 주님 앞에 드리는 헌신이요, 예물이요, 십일조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맞춤식 봉사자, 헌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헌신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32절에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곤고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옛날 성경에는 '온유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겸손한', '가난한' 뜻입니다. 그런데 그냥 가난한 것이나 겸손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가난, 거룩한 겸손을 의미하는 겁니다. 거룩한 가난, 거룩한 겸손은 진짜 가난한 마음, 낮은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 헌신이 내 마음을 소생케 합니다. 즉, 내 삶과 영혼, 믿음이 다시 살아납니다. 다시 하나님의 첫사랑으로 회생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이제 다시 기운을 차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헌신은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봉사나 헌신의 교회가 아닌지 오래입니다.

 

원래 교회는 섬기고, 봉사하며, 헌신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소위 하나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고, 지시하고, 일하는 대가로 봉급이나 사례를 받는 하나의 단체로 되어 버렸습니다. 목회자에게 봉급을 얼마를 책정해야 하는지, 반주자나 지휘자에게 사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각 사역에 따라 그 대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따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봉급에 대하여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봉급 받고 먹고살려고 목회자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해서 내게 주신 재능과 기술을 주님을 위하여 드리는 겁니다. 소위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앞에 기쁨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에 주님은 그 헌신한 나를 기뻐하시고 칭찬하시고, 도우시는 복이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33절에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거룩한 가난을 자처한 사람, 거룩한 겸손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자발적 가난을 실행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을 위하여 모두 드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과 기술을 드리는데 주님이 더 크게 복을 주시기 않겠습니까? 어디에 구속되거나 얽히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삶이 주님께 드리는 물질, 재능, 육신, 기술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헌신은 구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사역에 힘쓰시고,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을 위하여 헌신하면 그 삶과 가정, 사업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일 고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걱정이 무색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별해서 한 쪽으로 잘 모셔둔 사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적으로 부모님들은 당신이 드시기 전에 미리 자녀들을 먼저 챙깁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부름을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하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 한 것들은 모두 챙겨 주시기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35-36절에는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은 진행되는 겁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 원하시고,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만복으로 채워주실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 그 주님의 복을, 선물을 알아보고 자원하는 사람, 기쁨으로 봉사하는 사람, 마음껏 물질을 드리는 사람, 재능과 기술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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