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전도자의 자세(2016.10.02)
이한슬 작성시간 2016-10-03 13:39 조회수 2692


설교제목 : “전도자의 자세"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12장 14절~19절
설 교 자 :   담임사관
설 교 일 :  2016. 10. 02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복 주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복 주심을 찬양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심을 느끼십니까?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이 나의 갈 길을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발견하시고, 경험하십니까? 세상에서 이것만큼 큰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가장 큰 복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까? 말로 보여주십니까? 아니면 믿음의 증명서를 가지고 있습니까?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드러나지 않으면 내가 가진 믿음의 모습을 전혀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보여 줄 수 있지만, 또한 이렇게 믿고 있다는 또 다른 삶의 방법도 필요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나의 삶으로 증거하지 않으면 나의 믿음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고백하는 삶이 되지 않으면 과연 나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끄는 힘이 곧 내 삶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전도의 힘은 내 삶이 세상에 반영된 얼마만큼의 분량입니다. 전도의 힘은 곧 내가 가진 신앙의 힘이며, 삶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삶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진 않습니까? 전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삶의 영향력을 평가받고 싶지 않습니까?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복을 소유하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 전도의 삶은 누구에게, 어떻게 평가받고 있습니까?

 

사실 전도의 삶, 신앙의 삶을 누구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내가 소유한 신앙의 가치관과 그 삶에 대해서는 인정받아야 합니다. 인정 받지 못한 신앙인은 소위 평가도 되지 않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은 곧 복음의 삶입니다. 복음의 삶은 곧 많은 사람들을 주께 인도할 수 있는 능력, 힘이 되는 겁니다. 적어도 신앙인들 사이에서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주님이 기뻐하셔야 합니다.

 

특히 내가 전도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감동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나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부교가 되고, 정교가 되고, 어쩌면 헌신을 하여 주의 종으로 사역을 하는 것을 보면 그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또 전도를 하는 겁니다. 아이를 많이 낳아 본 임산부는 또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임신하고, 출산의 고통은 크지만 그 희열과 쾌감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전도자의 자세를 언급하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삶에 고난과 핍박이 닥쳐도 항상 기쁨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자기 몸의 유익과 쾌락을 구하여도 자신만은 오로지 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묵묵히 진리의 길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입니다.

 

1. 전도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죄에 빠져 있던 인류에게 주어진 죄 사함과 영생의 약속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삶을 아름답게 사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이 믿음이 생기도록 늘 복음을 말해야 합니다. 복음을 말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전도해야 할 그 사람이 왜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생기도록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복음을 힘써 땅 끝까지 전파해야 할 사명과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증거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는 곧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아도 죄인의 멍에와 짐을 진 채로 사느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사느냐 하는 양단 간의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함은 복음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복음을 자랑하고 담대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전도자 됨을 감추지 않고 세상에 드러내며 세상 끝과 세상 끝날 까지 복음을 만천하에 전파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전도자에게 명령하신 것이며, 이는 영혼 구원의 시급한 과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 중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전도자인 것을 감추고자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복음 곧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으로 여겨 바르게 전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고 자기 욕심에 굴복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오로지 팽창적인 교회의 양적인 증가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이 바라시는 교회의 참된 성장과 전도는 복음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러한 자세로서 복음 증거의 사역에 임해야 합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바로 전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을 바로 전하기 위해서 거듭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기를 소원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자세와 정신이 드러납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는 상대방이 그 복음을 듣기 싫어하던지 좋아하던 지를 막론하고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도가 전도자의 능력이나 언변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2. 전도자는 타인의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 15절을 보세요.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전도자 바울은 전도자로서의 자신의 목표를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재물에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영혼 구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재물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내어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전도자 바울은 이기적 욕심을 위하여 일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타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한 영혼의 구원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타인의 영혼의 소중함도 알고 사랑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일에도 자기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물에 빠져 죽는 것보다 더한, 영원한 멸망의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일은, 생명을 버리는 활동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에게는 희생이 따르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교인 하나를 기르는 데도 희생적인 수고가 필요합니다.

 

전도가 말로만 행해지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내어주는 일이라면 전도자에게는 뼈를 깎고 피와 땀을 쏟는 수고가 요구됩니다. 바울은 그 수고를 고후 11:24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고후 11:23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 전도를 위하여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행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겪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었고 여러 번 자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전도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이러한 수고를 각오하지 않으면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이러한 전도자의 자세를 망각한 채 오히려 사람보다는 재물을 취하고, 자신을 희생하려 하기보다는 타인에게서 이를 취하는 전도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는 아직도 옛사람의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 복음 전도자가 된 결과입니다.

 

3. 복음 전도자들은 동역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18절에서 그의 동역자 디도가 자신과 동일한 보조를 취했음을 역설합니다. 동일한 성령에 이끌려 행동했음을 역설했습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자들은 모두 '동역자'입니다. 그러므로 은사가 다르고 직임이 다르다 하더라도 동일한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즉 질서 있게 사역해야 하며 서로 유기적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특히 각종 분파주의가 성행하고 은사로 인한 다툼이 성했던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 이 교훈은 매우 절실하고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적지 않은 교회가 분쟁과 파벌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동역자 정신'의 결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므로 바울과 디모데의 모범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

 

또 한가지, 전도자들은 성령과 동역해야 합니다. 전도의 원동력은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다해야 합니다. 복음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성령의 역사 하는 대로 '힘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힘을 다한다는 말에는 '격투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전도는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격투하듯이 전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한 손으로는 사자의 수염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사자를 쳐서 양을 그 입에서 빼어내는 것과 같은 격투가 바로 전도자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런 불타는 정열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에게 세상을 이끄는 힘이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믿음의 영향력을 제공하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기를 원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주님을 향한 삶의 진정한 모습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19절에 보시면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자기의 변명이 아닙니다. 전도는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드러내고, 그 주님 앞에서 신앙인의 덕을 드러 내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자가 덕이 되지 못하면 곤란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 합니다.

 

전도의 동역자, 봉사의 동역자, 기도의 동역자 등 많은 동역자가 우리 교회에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덕을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인이 필요 합니다. 교회를 돕고, 목회자를 돕고, 사역자를 도울 수 있는 많은 신앙의 보조자, 동역자가 필요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우리 교회로 하여금 많은 신앙의 동역자를 이루어 내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힘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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